본문 바로가기

도서관

본문시작

칼럼

제목 천국의 철학과 지옥의 철학
분류 그리스도인의 삶
작성자 전체관리자 작성일 2024-06-27
첨부파일
천국의 철학과 지옥의 철학

악마에게서 (거꾸로) 배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철학’ (3/4)

by 강영안 2024-06-26

◀ 첫 번째 주제: 인식

◀ 두 번째 주제: 존재 

 

 

세 번째 주제: 사랑

 

서로 경쟁하게 하라!

 

 

이제 세 번째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악마에게 배우는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독교 철학. 그 핵심을 볼 수 있는 게 열여덟 번째 편지입니다. 

 

“지옥의 전체 철학은 ‘하나의 사물은 다른 사물과 별개’라는, 특히 ‘하나의 자아는 다른 자아와 별개’라는 원칙을 인식하는 데 있다. 즉 나한테 좋은 건 나한테 좋은 거고, 너한테 좋은 건 너한테 좋은 거지.” (151)

 

지옥의 철학은 한 사물은 다른 사물이 아니고, 특별히 한 자아는 다른 자아가 아니라는 공리를 인정하는 데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각자 따로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각자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좋은 건 나에게 좋은 것이고, 너에게 좋은 건 너에게 좋은 것이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한편으로 보면 각각의 개체성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자세히 보면 개체성의 인정보다는 서로 투쟁하고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입니다. 

 

“누군가 얻는 게 있으면 다른 누군가는 잃은 게 있는 법이다. 심지어 무생물도 다른 사물들을 공간에서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존재한다. 그러니까 자기가 확장되려면 다른 사물을 밀어내거나 흡수해야만 하지. 자아가 확장될 때도 마찬가지야. 짐승한테 흡수란 잡아먹히는 것이고, 우리한테 흡수란 강한 자아가 약한 자아의 의지와 자유를 빨아들이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경쟁한다’는 뜻이야.” (151-552)

 

우리 사회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각자도생, 각자 자기 삶을 도모해야 하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삶. 나는 나, 너는 너. 먹고 먹히는 관계. 지옥의 철학이 바로 그렇습니다. 

 

루이스는 이런 지옥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1961년판 서문’에 따로 썼습니다. 여기서 그는 지옥의 상태를 두려움과 불안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두 가지 동기로 행동한다. 첫째는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다. 전체주의 국가에 고문실이 있듯이, 내가 묘사하는 지옥에도 ‘무능한 악마를 위한 교도소’ 같은 더 깊은 지옥이 있다.” (278) 

 

스크루테이프가 웜우드에게 편지하면서 끊임없이 하는 것이 이런 협박입니다. 너, 잘못하면 여기 와서 먹힌다. 너, 먹힐 준비 해. 너, 벌 받을 준비 해. 이런 두려움입니다.

 

두 번째는 “일종의 굶주림”입니다. 루이스는 자기가 이 책을 쓸 때 생각해 왔던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둘째 동기는 일종의 굶주림이다. 나는 악마들이 영적인 의미에서 서로를 잡아먹을 수 있으며, 우리 인간도 잡아먹을 수 있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인간들의 삶 속에서도 같은 인간을 완전히 제 것으로 소화시키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지배의 열망을 보곤 한다.” (278)

 

타인을 먹고 싶어 하는, 타인을 내가 완전히 지배하고자 하는 악마적 동기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악마가 살고 있는 삶의 공간은 음침한 누더기 같은, 그 어떤 범죄의 소굴 같은 칙칙하고 어두컴컴한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깨끗한 데라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가장 큰 악은 카펫이 깔려 있으며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따뜻하고 깔끔한 사무실에서, 흰 셔츠를 차려입고 손톱과 수염을 말쑥하게 깎은, 굳이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는 점잖은 사람들이 고안하고 명령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당연히 지옥에 대한 상징으로서 경찰국가의 관료조직이나 아주 비열한 사업을 벌이는 사무실 비슷한 것을 택하게 되었다.” (276)악마가 사는 곳은 칙칙한 그런 공간이 아니라 깨끗하게 잘 차려진 최고급 빌딩 최고급 사무실 같은 데서, 이 속에서 먹고 먹히는 관계가 악마의 삶, 악마의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대비되는, 저 원수의 철학, 그리스도의 철학을 루이스는 열여덟 번째 편지에 이렇게 그려 놓고 있습니다.


“원수의 철학은 이렇게 명백한 진리를 계속해서 회피하려는 시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는 모순되는 걸 목표로 삼고 있지. 그가 볼 때 만물은 여러 개인 동시에 어쨌든 하나라구. 한 자아한테 좋은 것은 다른 자아한테도 좋은 것이고. 그는 이 불가능한 일을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이 천편일률적인 만병통치약은 그 작자가 하는 모든 일뿐 아니라 심지어 그 작자의 모든 성품에서도 감지해 낼 수가 있다.” (152)

 

이것을 저는 골로새서 2:8에서 말하는 “카타 크리스톤”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철학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성품, 그리스도의 성품,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이 가운데 수많은 다양한 것들이 하나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고, 나한테 좋은 건 너한테도 좋은 것이고 너한테 좋은 게 나한테도 좋은 것,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 하나의 공동의 선, 이것이 그리스도의 철학의 관점이라는 겁니다.


“원수 자신도 순수한 수학적 단일 개체가 되는 데 만족을 못 하고 자기가 하나인 동시에 셋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속셈은 이 사랑이니 뭐니 하는 터무니없는 말의 근거를 바로 자기의 본질에서 찾으려는 데 있다. 원수는 또 유기체라는 걸 물질계에 만들어 냈지. 유기체란 각 요소들이 서로 경쟁하게 되어 있는 자연의 숙명을 거슬러 서로 협력하게 되어 있는 음란한 발명품이야.” (152-153)


이렇게 유기적 관계를 서로 맺고 있는, 나와 네가 서로 떨어져 있는, 서로 무시하고 무관심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관심을 보유하고 서로 함께 이어져 있는 존재로 본다는 것입니다. 마치 나무뿌리가 땅 밑에서 다른 나무들과 함께 뿌리가 서로 연대하고 있어 서로의 삶을 북돋아 주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네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네가 있는, 그래서 너의 존재가 나의 존재를 세워주고 또 나의 존재가 또 다른 타인의 존재를 세워주는, 관용과 환대와 수용이 있는 삶의 방식, 이걸 일컬어서 스크루테이프는 “원수의 철학”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허기, 배고픔, 징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 지배합니다. 남녀가 나누는 사랑도 이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남녀가 나누는 사랑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홀로 계시지 않고, 성령과 성부와 성자로 서로 함께 손잡고 마치 춤추듯이 서로 엮어져 있듯이(페리코레시스, perichoresis) 서로 연대하고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천국의 삶의 방식,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입니다. 

 

루이스는 사랑을 나누는 것, 성, 결혼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 됨의 관계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에 와서 이것이 뒤틀어져 버렸다는 것을 편지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19세기 낭만주의에 와서 사랑에 빠지는 것이 결혼의 조건이 되고,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같이 살아서는 안 되는, 이혼 사유가 되어버린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다른 편지에서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