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aroslavKryuchka/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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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이 사진은 도자기 사진입니다.

도자기 항아리의 중앙 부분에 커다란 금이 가 있으며, 금이 간 조각을 한 손으로 잡고 있는 모습입니다.

도자기는 어두운 갈색 계열의 흙으로 만들어졌으며, 표면은 오래된 흔적과 마모가 보입니다.

손은 성인의 왼손이며, 엄지와 검지로 깨진 조각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리고 있습니다.

금 간 선은 항아리 전체에 걸쳐 여러 방향으로 뻗어 있어 수리 또는 복원이 필요한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바닥은 나무 재질의 평평한 면입니다.

[사진 끝]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라고 불과 얼마 전에 한 말이 무색하게 최근 나의 생활이 제법 공사다망해졌다.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흥미롭기도 하고 도전이 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새로운 교류들 가운데 올라오는 나의 반응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고, 도전이 된다는 것은 그 반응을 선의 방향으로 끌고 가고픈 마음 때문이다. 살짝 자신이 붙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물론, 잘 할 수 있어, 라는 의미의 자신감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이제 조금 알 거 같아, 하는 정도의 의미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집안이 넉넉지 않아서 보조바퀴 달린 어린이 자전거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어른용으로 자전거 타기를 배워야 했을 때, 정말 수도 없이 넘어졌지만, 넘어질 때마다 조금씩 감이 붙어서, 아, 알 거 같아, 하면서 연습을 했던 그때의 느낌에 가깝다.

하지만, 조금 알 것 같기는 해도 여전히 서툰지라 최근에도 한번 크게 넘어졌다. 역시 이런 건 나랑 맞지 않아, 하고 다시 익숙한 동굴로 들어갈까 하는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번 시작된 생명의 추동 덕분인지, 그래도 계속 해보자 하고 생각할 수 있었고, 공사다망해진 현재의 변화에 대해서 이렇게 흥미와 도전이라는 말도 쓸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제대로 못해서 관계가 틀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너무 잘하려고 해서 틀어지는 것이 관계이다. 왜냐하면 그때의 초점이 잘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에게 가 있고, 그렇게 잘하려는 자신은 올바르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또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 나 또한 별 다르지 않아서 제법 오래 그렇게 살아왔다. 자신은 악의가 없고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은 한편으로는 그러한 방향으로 더욱 노력하게 만드는 선 작용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옳고 선함을 방어하게 만드는 부작용도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갈등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나는 이렇게 잘하려고 한 것이다 하며 스스로를 계속 변호하게 되고, 자신의 입장을 이해시키려 들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대에게 화가 나게 된다.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이 선의를 상대가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어 하는 욕망의 선 작용이 상대를 살피는 노력이라면, 그 부작용은 상대에게 계속 맞추려 하면서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따로 예를 들지 않아도 금방 이해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것이 상대를 위한 배려인지 아니면 눈치를 보는 것인지,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회의가 드는 일은 비단 힘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경험하게 된다.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어 하는 욕망은 다른 말로 하면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기도 한데,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착한 아이가 되지 않으면 버림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부모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무척이나 애를 쓰며 살아왔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는 나를 한번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때로는 원한에 가까운 이 마음의 소리는, 아주 오래도록 마음에 머물며 때로는 노년기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기도 했다. 나 또한 이러한 인정의 욕망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20대부터 씨름해 왔던 이 문제가 30년이 넘은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조금씩 실마리가 풀리는 중이다.

이 착한 아이 혹은 착한 사람 신드롬이 잘 사라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모호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모호성 때문에 이것은 도달할 수 있는 목표로 보인다. 부모가 제시하는 착한 아이는 집집마다 다르고 그때그때 다르다. 때로는 조용히 있어야 착한 아이이고, 때로는 나서서 말을 잘해야 착한 아이이다. 어떤 때는 집을 깨끗이 치워야 착한 아이이고, 어떤 때는 집은 미처 못 치워도 동생을 잘 챙겨야 착한 아이이다. 그리고 어떤 것을 해도 제대로 잘 했다는 확인과 긍정 없이 그냥 야단치지 않는 정도로 모호하게 넘어가는 부모라면, 부모로부터 그 인정을 끌어내기 위해 아이는 자신을 불사를 각오를 할 것이다. 다음에는 더 정확하게 제대로 해내서 인정을 끌어내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관계의 패턴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끝나지 않고, 향후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전이가 되고, 그래서 심리치료에서는 이 전이를 제대로 인지하고 끊어내는 작업을 제법 오랫동안 하게 된다.

이런 관계의 패턴을 가진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았는데, 내가 자란 환경도 한국의 여러 가정과 별 다르지 않아서 나도 비슷한 어려움을 경험했다. 그런데 이 패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착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제대로 받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였다. 둘째 아이를 사산했을 때, 사람들은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게 나를 위로하는 길이라고들 생각했던 것 같지만, 사실 나는, 내 탓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말이 더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건의 정확한 인과 관계는 원래 밝히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가 좀 더 스트레스 관리를 잘해서 면역 상태가 좋았다면 당시 유행하던 간염에 걸리지 않았을 수 있고, 그러면 아이가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스트레스의 원인은 그렇다면 무엇인지를 따지고 따지며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잘잘못의 관계들은 풀 수 없게 복잡해진다. 그리고 내 뱃속에서 아이가 죽어서 나왔는데, 거기에 나와 관련된 원인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그것도 사실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차라리, 무언가가 얽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 사람 사는 데에 그렇게 나 혼자 때 하나 안 묻히고 깨끗하고 착한 사람인 그런 관계는 없다, 괜찮다, 다 용서받을 수 있다 하는 그 내면의 소리가 오히려 위로가 되었고,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비로소 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이 경험을 하면서 기독교가 정말로 존재의 근원의 차원에서 말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착한 사람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아니어도 된다는 것, 착한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존재로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는 그 진리가 체화되기까지는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시작은 그때였다.

물론 이 말은, 윤리적이거나 도의적인 차원에서 잘잘못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사회적 정의 구현의 차원에서 제대로 회복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사실 관계들을 따지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것보다 좀 더 깊은 차원의 이야기이다. 말하자면, 사회적 차원에서 할 일이 있고, 개인적 차원에서 각자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 것이며, 그것을 우리는 존재론적인 문제라고 한다.

성경에서 바울은 자신이 곤고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선의 방향으로 잘 움직여지지 않는 깊은 고뇌를 토로했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겠고, 내 마음 내 맘대로 안 되는 그런 교착의 지점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법 혹은 선을, 착한 행실이나 모두에게 칭찬받는 좋은 사람의 행실로 이해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하나님의 법은 행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존재와 관련된 것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줄 아는 역량을 갖춘 존재의 문제이다. 인간은 그 역량을 타고났고, 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때 가장 인간다워진다는 것이 기독교의 지론이다. 이 즐거움을 아는 첫 단계가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고, 착한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내가 되고 싶어 하는 나의 어떤 모습이 있는 것은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것을 내 것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제법 치열하고 힘든 싸움이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 치열한 싸움을 추동하는 시작인 동시에 과정이자 목표라는 그 믿음이 우리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이다.

믿음은 특별한 신념도, 초인적 힘을 발휘하게 하는 능력도 아니다. 그것은 사망도 생명도, 천사나 세도가도, 현재 일이나 미래 일도, 하늘 같은 높음이나 지옥 같은 깊음도, 그 어떤 것도 이 근본적인, 모든 것의 시작인, 사랑을 끊어낼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다. 이러한 사랑은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경험으로 아는 게 아니라, 상상력으로 안다. 경험으로 아는 것은 이 사랑을 추측할 수 있는 자그만 단서들일 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자그마한 단서들이 소망을 준다. 이런 게 있구나, 그렇다면 하나님 단위의 사랑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상상하게 된다. 비교도 되지 않을 영광이라고 바울은 표현했는데, 그것은 어쩌면 표현될 수 없는 차원의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착한 것과는 무관하다. 착함의 정도로 도달할 수 있는 영광이라면 그것은 좀 시시하다. 기독교가 그런 시시한 것을 말하는 종교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다. 자신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다고 하는 바울의 말은 아마도 거기에서 연유하지 않을까. 그는 곤고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믿은 것은 결코 시시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