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설명]

이 사진은 방주 모양입니다.

이미지에는 하늘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형태의 건물 일부가 클로즈업으로 보입니다.

건물은 회색빛의 나무 판재처럼 보이는 재질로 덮여 있으며, 곡선과 직선을 결합한 조형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부드럽게 휘어진 외벽과 위쪽으로 솟은 곡선 구조물이 특징입니다.

하늘은 맑은 청록색이며 구름이 희미하게 퍼져 있어, 건물의 형태와 대비를 이룹니다.

전체적으로 건축물의 질감, 형태, 색감이 강조된 구도입니다.

[사진 끝] 

 

언뜻 보기에 홍수 이야기는 고대 대홍수 또는 동물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내가 어릴 때 교회에서 배운 건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홍수 이야기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신학교에서 홍수 이야기를 공부하면서,

나는 이 이야기야말로 사실상 하나님이 자신이 사랑하는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묘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새로운 통찰력은 홍수 이야기를 향해서 내 속의 새로운 사랑을 불러일으켰다.

홍수 이야기에는 깊이 생각할 주제들이 많지만, 오늘은 그중에서 딱 하나, 방주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방주의 디자인을 분석하면, 방주야말로 창조의 축소판, 성전, 그리고 부활의 표지, 이 세 가지를 함께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조의 축소판

일단 가장 흔히 받는 오해부터 바로 잡자. 방주는 배가 아니었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종류의 배는 아니었다. 창세기 6-7장에 따르면, 방주의 건축 양식은 집에 더 가까웠다.

방주는 “방들”(6:14)로 구성되어 있었고, “창문”(NASB, KJV, NLT에서 정확하게 번역됨)과 “문”(16절)이 있었다.

하지만 방주는 단순한 집이 아니라 창조 그 자체를 상징한다.

방주는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다양한 종의 새, 짐승, 그리고 기는 것들이 거기에서 살았다(6:20; 7:23; 8:17).

이 세 층은 창조의 삼중 층, 곧 하늘과 땅과, 그리고 땅 아래(출 20:4; 신 4:17-18)와 일치한다.

창조와의 동일시를 더욱 확증하기 위해,

방주의 “창문”과 “문”은 위에 있는 “하늘의 창들”과 아래의 “큰 깊음의 샘들”(7:11)과 평행을 이루며,

이 두 개의 샘 모두가 대홍수를 일으키기 위해 열렸다.

창세기 이야기는 방주를 창조의 축소판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거기서 언약 백성과 함께 거하시며 다스리시는 창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도 베드로가 노아 시대를 인류 역사를 나누는 주요 사건으로

여긴 이유들 가운데 하나도 다름 아니라 방주가 창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벧후 3:6).

“그 당시 세상”이 하나님의 대격변적 심판으로 황폐해졌다면, “지금 있는 하늘과 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7절). 

성전

방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상기시킨다. 방주 속 동물들은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구분되었다(창 7:2, 8; 8:20).

이는 주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신정 통치하실 때(레 11장)와 동일한 분류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으로 구별하시고 언약적 교제의 유대로 묶으셨다.

방주 안에서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구분된 것은 방주가 그 자체로 거룩한 거처였음을 알려준다.

방주는 창조의 축소판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성전이기도 했다.

초기의 창조 현장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함께 거했던 우주적 성전이었음을 고려하면 이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홍수 때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 안에서 주님과 함께 거했는데, 이는 주님께서 노아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안식”을 상징한다(창 5:29).

이 안식에도 의미가 있지만, 그것은 참된 안식, 곧 참된 노아인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오실 “안식일”(히 4:9)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아담이 기대했던 것, 그리고 그보다는 덜한 형태였지만 노아도 경험했던 것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완성된 영광 가운데 온전히 경험할 것이다. 할렐루야! 

부활의 단면

방주는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것이 이사야가 방주를 재해석하며 바라본 비전이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 칠 것입니다.

주님의 이슬은 생기를 불어넣는 이슬이므로, 이슬을 머금은 땅이 오래 전에 죽은 사람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땅이 죽은 자들을 다시 내놓을 것입니다.

“나의 백성아! 집으로 가서, 방 안으로 들어가거라. 들어가서 문을 닫고,

나의 진노가 풀릴 때까지 잠시 숨어 있어라.” (사 26:19–20)내용을 입력하세요.

이사야 26장의 대부분은 역사의 종말에 일어날 심판에 대한 환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종말이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징벌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방”에서 “문을 닫고 있으라”고 명하셨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죽음을 상징한다(20절, 필자의 번역).

이사야 26:20은 당신의 백성을 이 방으로 초대하신 주님이 거기서 “그들 뒤에 있는 문을 닫으시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사야가 침실의 비유를 사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에게는 죽음이야말로 타락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받는 침실에서의 편안한 잠과 같음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이사야는 창세기 7:16에서 이 비유를 빌려왔는데, 주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 뒤에서 방주의 문을 “닫으셨다.”

이 비유를 통해서 이사야는 방주 안에 갇힌 노아 가족이 지금 죽음의 물을 통과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홍수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노아를 방주의 장막으로 초대하신다(1절).

이사야 26:20에서처럼 하나님은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 뒤에서 문을 잠그신다(16절).

그럼으로 방주는 적대적인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시간이 지날 때까지 피난처 역할을 하는 일종의 장막이다.

그러므로 방주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의 경험을 상징한다. 방주는 말 그대로 물 위에 떠다니는 관이었고, 또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인 치신 성소였다.

심판이 끝나고, 그들이 배에서 내리는 것은 바로 부활의 상징이었다.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했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시체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잠자던 사람들이 깨어나서, 즐겁게 소리 칠 것입니다.”(사 26:19).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 자신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의 죽음을 마주한 상태로 살고 있다.

하지만 방주는 우리가 죽음을 두려움 없이 직시하고 소망을 가지고 마주할 수 있음을 강력하게 일깨워 준다.

우리에게 죽음은 깊은 잠에 불과하다. 부활할 때, 우리는 이 잠에서 깨어나 새 하늘과 땅의 참된 방주 안에서 진짜 노아와 함께 거할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안식 중의 안식을 주실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20에서 똑같은 결론을 내리기 전에,

모세는 이미 오래 전 창세기에서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참으로 방주는 단순한 배 이상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출처: Take a Closer Look at Noah’s 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