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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70인역'이 있기에 구약이 있다- [ 쉽게읽는중간사 ] (9) | ||||
| 분류 | 성경과 신학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5-08-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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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인역'이 있기에 구약이 있다 [ 쉽게읽는중간사 ] (9) [그림]
[그림 설명]
이 이미지는 중세 또는 르네상스 시대의 종교 화가 그린 인물 초상화입니다. 인물은 성 제롬(Saint Jerome)으로 알려진 교부로 추정되며, 고대 기독교 신학자이자 성경 번역가입니다. 화면 중앙에는 긴 수염과 대머리인 노인이 책상에 앉아 펜으로 원고를 집필하고 있으며,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모습입니다. 그의 주변에는 책, 두루마리, 잉크병, 필기 도구 등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으며, 위쪽 선반에는 과학 기구나 신학적 도구로 보이는 물건들이 걸려 있습니다. 아치형 천장 구조 아래에는 라틴어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전체 구도는 성인의 지성과 신앙, 학문적 몰입을 상징하며, 고요하고 성찰적인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그림 끝]
기독교 역사에서 '70인역'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독교가 오늘날처럼 세계 종교로 발돋움한 데에는 70인역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죽은 다음 헬라 제국이 애굽과 시리아, 소아시아, 마케도니아로 갈라진다. 애굽에는 프톨레미 왕조가 들어서는데 유대가 프톨레미 왕조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인구 100만의 세계적인 도시였고 도서관에는 20만 권의 장서가 있었다.
프톨레미 1세(프톨레미 소테르)를 이은 프톨레미 2세 (프톨레미 필라델포스)가 유대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하고 싶어 했고,
도서관장 데메트리우스는 세계의 모든 책을 다 소장하고 싶어 했다. 자기 당대에 장서 50만 권이 목표였다.
율법서를 번역하려면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두루 능통한 사람이 필요하다. 율법에도 능해야 하지 않겠느냐 싶지만, 율법은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당시 히브리어는 생활 언어가 아니었다.
생활 언어로는 아람어를 썼고 율법을 연구하는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 히브리어를 알았다.
히브리어를 안다는 얘기가 곧 율법에 능통하다는 뜻이었다.
도서관장 데메트리우스가 이 문제를 프톨레미 2세에게 보고하고 유대에서 율법에 능통한 학자를 초빙하기로 했다.
유대 율법서를 번역하는 마당에 유대인을 노예로 부리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우선 애굽에서 노예로 지내는 유대인들을 해방하기로 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애굽에는 12만 명의 유대인 노예가 있었다고 한다.
애굽에는 바벨론 포로기 이전부터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바벨론 포로기 때 총독 그달랴를 죽이고 애굽으로 간 사람들도 있었다.
또 프톨레미 1세 때 전쟁 포로도 있었고, 자발적으로 간 사람도 있었다.
프톨레미 2세가 속전으로 1인당 20드라크마씩 모두 460달란트를 내어주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고 애굽으로 갔던 사람들의 후손이 300년 만에 다시 출애굽을 하게 된 셈이다.
당시 대제사장이 엘르아살이었다. 프톨레미 2세가 엘르아살에게 금 50달란트를 예물로 보내며 율법에 정통하며
헬라어에 능한 학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이렇게 해서 각 지파별로 6명씩 72명을 파송했다.
주전 250년 경에 먼저 모세오경이 번역됐고 나머지는 그 후 100년에 걸쳐서 계속 번역됐다.
실제로는 72명이 번역에 참여했지만 70인역이라고 부른다. 전해 오는 얘기에 따르면,
72명이 각자 독방에서 번역했는데 끝난 다음에 맞춰보니 전부 똑같았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모세오경 번역이 끝난 후 프톨레미 2세가 유대로 돌아가는 학자들에게 최고급 옷 세 벌과 금 두 달란트,
한 달란트 값어치의 잔 한 개와 가구들을 선물로 줬다고 한다. 그만큼 극진하게 대접했다.
요컨대 70인역은 헬라어로 된 구약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자기들의 언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70인역을 번역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정확한 얘기가 아니다.
당시 히브리어는 디아스포라는 물론이고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도 별도로 익혀야 하는 언어였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은 아람어를 썼고 디아스포라는 헬라어를 썼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서 성경을 번역했다고 하기에는 작업이 너무 방대하다.
그런 엄청난 일을 다른 나라의 속국으로 지내는 백성들이 무슨 수로 감당한단 말인가?
그들을 위한 작업이라면 성경을 이방 언어로 번역할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를 익히게 하는 편이 유대인 생리에 맞지 않나 싶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적이 있다. 바리새인들이 지적하자, 예수님이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했다.
또 바리새인들이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지 물었을 적에는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했다.
만일 바리새인이 아닌 평범한 유대인이 물었으면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했을 것이다. 당시 성경은 읽는 책이 아니라 회당에서 듣는 책이었다.
지금처럼 인쇄한 것이 아니라 일일이 필사했기 때문에 워낙 고가이기도 했지만,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만 히브리어를 읽을 수 있었을 뿐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70인역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기독교가 구약 없이 신약만 있는 종교가 됐을 것이다.
잠깐 따져 보자. 우리가 보는 구약은 39권이다. 그러면 70인역도 39권으로 돼 있을까?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유대교에 뿌리를 둔다. 우리한테는 신약과 구약이 있지만 유대교에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 구약만 있는가 싶지만, 그렇지도 않다. 신약이 없으니 구약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구약이라고 말하는 책을 그들은 '타나크'라고 한다. 토라(율법서)와 느비임(선지서), 케투빔(성문서)를 합한 말이다.
24권으로 돼 있는데 내용은 우리가 보는 구약과 동일하다. 편집의 차이일 뿐이다.
가톨릭은 그렇지 않다. 가톨릭의 구약은 우리가 보는 구약과 다르다. 우리가 정경(正經)으로 인정하지 않는 외경이 포함돼 있다. 정경은 성경의 다른 말일 수 있는데 '표준(Canon)'이라는 뜻이 있다.
외경은 표준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토비트, 유딧,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 지혜서, 집회서, 바룩이 그렇다.
외경에도 포함이 안 되는 위경(僞經)도 있는데 거짓 위(僞)를 쓴다고 해서 내용에 거짓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책에서 말하는 저자가 실제 저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에녹서'는 에녹이 쓴 책을 표방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고대에는 자기가 쓴 책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유명인의 이름을 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첨언하면, 우리가 외경이라고 하는 책을 가톨릭에서는 외경이라고 하지 않는다.
외경(外經)은 편집 과정에서 본편에 수록되지 못하고 배제된 경전이라는 뜻인데, 가톨릭에서는 본편에 수록돼 있기 때문이다.
70인역은 애굽의 프톨레미 2세 때 번역됐다. 프톨레미 왕조는 클레오파트라를 끝으로 문을 닫고 로마가 세계의 주인이 된다.
한동안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주후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받더니 주후 395년에는 로마의 국교가 된다.
라틴어가 그만큼 중요하게 됐다. 헬라어로 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할 필요를 느끼게 됐고,
제롬(Saint Jerome, 347~420)에 의해 '불가타역'이 탄생한다. '불가타'는 '대중적인'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우리한테는 성경이 한 권의 책이다. 그러면 70인역이 번역될 당시에도 그랬을까? 성경을 뜻하는 '바이블(Bible)'은 '책들'이라는 뜻의 헬라어 '비블리아(Biblia)'에서 나온 말이다.
성경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들로 이뤄졌다.
유대교의 경전인 타나크는 주후 90년 얌니아회의에서 결정됐다.
전래되는 숱한 고대 문서 중에 어떤 것이 성경이고 어떤 것이 성경이 아닌지 구별한 것이다.
제롬이 불가타역을 번역할 때 70인역에는 외경이 포함돼 있었다. 그것을 전부 번역하면서, 외경은 읽어서 유익하지만 거기에서 교리를 도출하면 안 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그때부터 불가타역이 1000년 동안 유일무이한 공식 역본으로 인정됐는데, 시대가 변하면서 라틴어 역시 종교 언어가 되고 말았다.
이름은 불가타역인데, 모든 대중이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제들만 읽을 수 있었다.
성경을 자국의 언어로 번역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하지만 당시는 성경을 번역하는 것이 불법이었다.
거룩한 말씀을 세속적인 언어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루터를 위시한 많은 종교 개혁자가 그런 논리에 동의할 리가 없다. 루터는 제롬처럼 외경을 따로 모아서 번역했는데, 초기에는 그런 번역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나중에는 외경을 뺀 번역이 나오기 시작했다. 1000년 넘게 이어지던 불가타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가톨릭에서 이것을 묵과하지 않았다. 불가타역의 권위를 주장하면서, 이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했다. 개신교 측이라고 해서 가만히 있을까? 당연히 반발했다.
외경 제외를 공식화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가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다른 구약을 갖게 되었다.
강학종 목사 / 하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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