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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제목 짧은 시간에 일어나 짧은 시간에 몰락한 바벨론 [ 쉽게읽는중간사 ] (3)
분류 성경과 신학
작성자 전체관리자 작성일 2025-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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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에 일어나 짧은 시간에 몰락한 바벨론

[ 쉽게읽는중간사 ] (3)

[그림]

벨사살의 연회를 묘사한 렘브란트(1606~1669)의 그림.
 
[그림 설명]

이 그림은 회화 작품입니다.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1635년에 그린 《벨사살의 연회》라는 유화입니다.

화면 중앙에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왕관을 쓴 중년 남성이 놀란 표정으로 몸을 뒤로 젖히고 있습니다.

그의 시선은 오른쪽 위의 빛나는 벽 쪽을 향하고 있으며,

그곳에는 허공에 나타난 손이 히브리어 글씨를 쓰고 있습니다.

왕의 주변에는 술잔과 과일이 놓인 연회 테이블이 있고,

여러 인물들이 놀라움과 공포에 찬 표정으로 시선을 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아래에는 포도주 잔을 들고 있는 여성도 보입니다.

그림 속 빛은 위쪽의 글씨와 손에서 나와 장면을 강조하며,

주변은 어둡고 극적인 명암 대비가 두드러집니다

[그림 끝]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사신을 보낸 적이 있다. 주전 700년경이다.
그 일이 있기 얼마 전에 예루살렘을 공격하던 앗수르 군사 18만 5000명이 하룻밤에 몰살당했으니
히스기야의 안부보다 그 비결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벨론은 앗수르의 눈치를 보는 나라였다.
남 왕국 유다와 국방력 차이가 별로 없었다.



# 앗수르의 몰락과 중근동 권력 재편

한동안 앗수르가 중근동 지방의 패자였다.
그 시절 앗수르의 군사력은 보병 170만, 기병 20만, 전차 1600대에 달했다.
그런데 주전 627년에 앗수르 바니팔 왕이 죽은 다음에 급격하게 쇠약해진다.
그 틈을 타서 속국이던 바벨론이 독립을 선언하더니 메대와 연합해서 앗수르를 공격했다.
주전 612년에는 수도 니느웨를 함락시켰다.
앗수르는 갈그미스를 중심으로 세력을 정비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앗수르가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애굽이 될 것이었고,
애굽의 바로 느고가 군대를 일으킨다.
중근동의 세력 균형을 위해서 앗수르가 존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갈그미스로 가려면 팔레스타인을 지나야 한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세웠던 것처럼 애굽의 바로 느고도 그런 격이었다.
관심이 바벨론에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나라 군대가 자국 영토를 지나는 것을 용인할 수는 없다.
유다 왕 요시야가 길을 막았다.
하지만 애굽의 군사력을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한다.

요시야의 죽음은 유다의 국운이 다했음을 말해준다.
요시야가 죽자,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지만 왕다운 왕이 없었다.



#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 70년

요시야의 맏아들은 엘리아김이다.
그런데 백성들이 동생인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옹립했다.
광해군의 형 임해군이 난폭한 성격 때문에 신하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던 것처럼
엘리아김한테도 뭔가 결격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갈그미스에 도착한 애굽이 일시적으로 바벨론을 저지한다.
그 기간 동안 바로 느고가 하맛 땅 립나에 주둔하면서 여호아하스를 잡아가고,
그의 형 엘리아김을 여호야김으로 이름을 바꿔서 왕으로 세운다.
유다가 애굽의 속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애굽이 계속 득세한 것은 아니다.
갈그미스 전투는 결국 바벨론의 승리로 끝나고 앗수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주전 605년의 일이다.
바벨론은 여세를 몰아 애굽까지 진격했다.
느부갓네살이 왕자의 신분으로 가나안을 지나 애굽 국경까지 진출했는데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중간에 바벨론 왕 나보폴라살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은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서 바벨론으로 돌아가야 했다.

느부갓네살이 가나안 지역에 머무는 동안 유다는 바벨론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본국으로 돌아간 틈을 타서
여호야김이 친애굽 정책을 쓰면서 바벨론의 압제에서 벗어날 궁리를 한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한테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거듭 얘기했지만 듣지 않았다.

바벨론은 짧은 시간에 일어나서 짧은 시간에 몰락했다.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이긴 것이 주전 605년인데
바사 왕 고레스한테 멸망한 것이 주전 539년이다.
대제국이 불과 70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70년은 우리 귀에 상당히 익숙한 기간이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70년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남 왕국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다.
나라가 완전히 망하기 전인 여호야김 3년(주전 605년)에 1차 포로가 있었다. 다니엘이 이때 잡혀갔다.
여호야긴 1년(주전 597년)에 2차 포로가 있었는데 이때는 여호야긴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잡혀갔다.
시드기야 11년(주전 586년)에 3차 포로가 있었다.
이때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고 성전이 불에 탔으며 시드기야왕을 비롯한 백성들이 잡혀갔다.
나라가 망한 것이다.
나중에 이스마엘이 바벨론에 의해서 총독으로 임명된 그달랴를 살해했는데
그때도 느부갓네살의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남은 백성들을 잡아갔다.
주전 581년의 일이다.

그에 반해서 포로 귀환은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고레스 칙령이 주전 538년에 있었는데 이때 스룹바벨의 인도로 1차 귀환이 있었다.
주전 458년에 에스라의 인도로 2차 귀환이 있었고 주전 444년에 느헤미야의 인도로 3차 귀환이 있었다.

이렇게 따지면 얘기가 이상하게 된다.
1차 포로와 2차 포로, 3차 포로, 4차 포로,
그리고 1차 귀환과 2차 귀환, 3차 귀환을 어떻게 짝지어도 70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신 성전을 기준으로 하면 햇수가 맞아 떨어진다.
주전 586년에 무너진 성전이 주전 516년에 재건되었으니 정확히 70년이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숫자는 상징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

"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같이 될 것이라
잊어버린 바 되었던 너 음녀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다니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
그가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할 것이며(사 23:15~17)"

하나님께서 70년 동안 두로를 벌하겠다고 하셨다.
이때의 70년은 정말로 70년이 아니라 완전수 7에 많다는 뜻의 10을 곱한 수이다.
하나님께서 충분히 오랜 기간 두로를 벌하시겠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70년도 그런 뜻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히스기야 당시만 해도 바벨론의 국방력은 유다와 별 차이가 없었다.
같이 머리 맞대고 앗수르의 위협에서 벗어날 궁리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주전 586년에는 유다를 멸망시킬 만큼 기세가 등등하더니
50년이 채 되지 않은 주전 539년에 멸망했다.
1차 포로 때 끌려간 다니엘이 그때까지 생존해 있었다.



# 느부갓네살 이후, 바벨론의 몰락과 고레스의 등장

바벨론이 잠깐이나마 중근동의 패자가 된 것은 느부갓네살이라는 걸출한 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이 죽자, 급격히 기울어졌다.
느부갓네살의 아들 에윌므로닥이 재위 2년 만에 매부인 네르갈사레셀에게 피살된다.
네르갈사레셀이 죽은 다음 그의 아들 라바시마르둑이 왕위를 계승하지만 이내 나보니두스에게 암살당한다.

본래 바벨론에서 섬겼던 신은 마르둑이다.
그런데 하란 출신인 나보니두스는 어머니가 섬겼던 달의 신 신(Sin)을 섬겼다.
심지어 아들 벨사살에게 나라를 맡기고 자신은 신(Sin)을 섬기기 위해서 10년 동안이나 아라비아 사막 너머에 기거하기도 했다.

벨사살이 연회를 베풀고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과 은그릇을 술잔으로 쓰면서 우상을 찬양한 적이 있다.
그때 손가락이 나타나서 벽에 글자를 썼는데 뜻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벨사살이 누구든지 그 뜻을 해석하는 사람은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겠다고 한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자기 아버지 나보니두스와 자기에 이은 세 번째 자리를 준다는 것이다.
비록 자기가 정사를 돌보고 있지만 진짜 왕이 따로 있었다.

바벨론의 새해 잔치를 '아키두'라고 한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오랜 풍습이었는데 나보니두스가 10년 동안 사막에 가 있으면서 아키두가 중단됐다.
이런 나보니두스의 행태가 달갑게 보였을 리 없다.
처음에는 마르둑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싹트더니 나중에는 백성들까지 반감을 갖기 시작했다.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나보니두스가 바벨론으로 돌아와서 아키두를 부활하고
분위기를 쇄신하려고 했지만 이미 민심이 떠난 다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레스가 바벨론을 침공했다.
나보니두스에게 등을 돌린 백성들이 고레스를 오히려 환영했다.
바벨론 성벽은 높이가 120m, 두께가 32m에 이르는데 그런 성벽이 두 겹으로 되어 있었다.
성벽 둘레에는 60m 폭의 해자가 있었고, 성안에는 십 년 치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 90km에 이르는 성벽을 돌아가면서 100개의 문이 있었는데 모두 청동으로 돼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견고하고 화려했다. 그런 성이 허무하게 함락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바벨론은 짧은 시간에 일어나서 짧은 시간에 몰락했다. 불과 70년 만에 문을 닫은 것이다.
70년은 우리 귀에 상당히 익숙한 기간이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70년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강학종 목사 / 하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