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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제목 | 나는 뜬구름 잡는 설교를 하기로 결심했다 | ||
| 분류 | 목회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4-08-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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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뜬구름 잡는 설교를 하기로 결심했다
비밀스럽고 신비한 교회 by 이춘성2024-08-06
교회 개척합시다!
어느 날, 아내가 뜬금없이 교회를 개척해야 하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라브리(L’Abri)라는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10년 넘게 한 후, 기독교 윤리와 문화를 공부하기 위해 학교에 다닌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그동안 여러 지역 교회에서 다양한 사역을 했다. 지난주에는 고등학교 3학년 아들이 교회 여름 수련회를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자신이 아홉 군데의 교회를 다녔다고 하니 아이들이 모두 놀랐다고 했다. 내 기억 속에는 그렇게 많은 교회에서 사역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역자가 되어 거쳐 간 교회를 보니 그 정도는 되는 듯했다. 지난 20년 동안 양양 설악산 아래의 산속에 있는 대여섯 명의 노인들만 모인 교회에서부터 누구나 다 아는 대형 교회까지, 아주 보수적인 정치색이 있는 교회에서 진보적인 교회까지, 이렇게 다양한 환경과 지역에서 사역한 사역자도 드물 것 같다.
아내의 말을 들으면서 이제는 내가 교회를 개척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먼저 교회 개척 얘기를 꺼낼 때마다 아내는 한 번도 긍정적인 답을 한 적이 없었다. 몇 번의 청빙 제안이 있었지만, 여러 이유로 사양했다. 개척을 염두에 두고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지만, 그 교회에서 내가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때마다 아내와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교만해 보일지 모르지만, 난 내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내가 먼저 개척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말을 하자,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마음에 정해놓은 바가 있다. 그것은 목사의 소명인 설교에 대한 것이다.
나는 실용적이지 않은 설교를 하기로 결심했다
아내는 최근 설교를 쉬고 있는 나의 모습에 불안함을 표한다. 사실 난 작년 교회를 옮기기 전까지 주일 설교를 한 번도 쉰 일이 없었다. 전도사 때부터 청년부를 맡았고, 이후에는 가는 교회마다 그곳 담임 목사님들이 부교역자인 나에게 주일 오전이나 오후 설교를 맡겼다. 그래서 설교를 쉬어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대형 교회로 옮기면서 설교 기회가 1년에 몇 번 주어지지 않았고, 지금은 협동목사로 바꾸고 기관사역을 하니 설교할 기회가 적다. 그러다 보니 이런 내 모습에 아내가 자꾸 불안해한다. 하지만 난 설교하지 않는 내 모습이 좋다. 그리고 설교 없는 자연인으로서 신앙의 자리에서 나의 본모습과 마주한다. 다른 성도들과 별다를 게 없는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에는 낯설지만, 그것이 내 모습인 걸 이제는 부정하기 어렵다.
목사에게 설교는 복이지만, 동시에 저주다. 야고보 사도는 가르치는 자들의 혀에 대해서 경고하신다(야고보서 3:1-12). 혀는 불과 같아서 모든 것을 태운다. 혀는 배의 키와 같아서 방향을 결정한다. 가르치는 자의 혀는 더 위험하다. 동시에 가르치는 혀의 위험은 기만이다. 스스로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에 이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그 착각이 성도들의 삶을 강요하고, ‘가스라이팅’ 한다. 그래서 난 성도들의 삶에서 거리감이 있는 실용적이지 않는 설교를 하기로 결심했다.
아내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도들이 실제로 필요하고 당장 도움이 되는 내용을 설교해 줘.” 그러나 아내의 애정과 걱정 어린 조언에 단호히 ‘아니’라고 말하기로 했다. 내가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T’(직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난 복음서의 예수님이 가르친 가르침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공감 전문가, 연민과 이해의 달인, 최고의 심리 치료사, 상담가로 설명한다. 그러나 난 성경에서 예수님의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나 같은 공감이 어려운 ‘T’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 세상과 인간의 죄를 누구보다 이해하시고 공감하시는 분이시다(히브리서 4:15).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공감보다는 공감 위에 살짝 떠 있는 뜬구름과 같다.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고치신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어라.” (마태복음 8:22)
여기에서 예수님의 공감을 찾을 수 있는가? 예수님이 혈육의 가족인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을 만난 자리에서 하신 말씀은 또 어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들이다.” (누가복음 8:21)
혈육의 가족을 향해서 예수님의 모습이 공감의 전문가이자 상담가의 모습일까? 또한 예수님은 이렇게 하신 이유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먹고 눈이 감기어 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지금 보고 있으니 복이 있으며, 너희의 귀는 지금 듣고 있으니 복이 있다. (마태복음 13:13-15)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실용적이어서 당장 적용이 가능한 말씀은 찾아보기 어렵다. 모두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와 가르침이다. 이것이 누구를 위한 것일까? 답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밀스럽고 신비한 교회
나는 실용적인 설교를 하지 않기로 했다. 오해는 없기를 바란다. 현실의 여러 문제를 외면하고 산속 수도원을 위한 설교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조금은 어렵다고 생각되고, 당장 집에 돌아가 적용할 수 없어서, 이게 필요할까 싶은데, 시간이 조금 지나면 그 맛이 생각나서 다시 찾는 나만 아는 식당 같은 그런 비밀스럽고 신비한(무스테리온, μυστριον) 설교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 교회를 개척하고 싶다.
실용적이지 않더라도 깊이 있고 본질적인 진리를 담은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더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현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더 큰 영적인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함께하고 싶다. 설교를 통해, 교회를 통해, 그 비밀스럽고 신비한 진리를 함께 나누며 살아가고 싶다.
나는 아직도 설교의 능력을 믿는 구닥다리 목사이다. 그래서 설교가 실용적인 도구로 변하는 요즘의 모습과 성도들의 기대에 깊은 한계를 느낀다. 마치 설교가 유튜브의 여러 실용적인 강의와 경쟁하는 것 같다. ‘좋아요’와 ‘조회수’가 지배하는 현대적 가르침의 무대 위에서 경쟁하는 설교가 교회와 예수님의 신비하고 ‘T’스러운 메시지를 담을 수 있을까? 현대의 설교가 실용성과 대중성에 치우치기보다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시간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 나는 그런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일상에서도 하나님의 신비한 진리를 체험하고 살아가기를 꿈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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