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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제목 종교는 왜 필요한가?
분류 이슈
작성자 전체관리자 작성일 2024-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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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왜 필요한가?

리뷰: 미로슬라브 볼프의 ‘인간의 번영’

by Greg Forster 2024-08-05

나는 미로슬라브 볼프의 인간의 번영:지구화 시대, 진정한 번영을 위한 종교의 역할을 묻다(Flourishing: Why We Need Religion in a Globalized World)를 리뷰하는 것보다 더 힘든 과제를 받은 기억이 없다. 이 책은 진지한 통찰이 필요한 주제에 대한 심오한 신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하지만 예일대학교 종교학 교수인 볼프는 책의 중심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 탐구하지 않는 글쓰기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이 책 초반에서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루었지만(나는 그 점을 축하하고 싶다), 그는 여전히 모든 정치 및 경제 시스템을 무차별적으로 비난하는 경향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교회와 세상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교회와 세상, 두 가지 모두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다음은 볼프의 말이다. 

 

나는 하나님이 인간과 맺은 관계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삶의 모든 차원에서 인간의 삶과 번영을 위한 가능성의 조건으로 간주한다. (9)

 

하루하루 제자도의 충실한 삶을 구축하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도, 그리고 성공에 대한 진지한 희망을 가지고 정치적, 경제적, 가족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우리에게 이 문장에 담긴 판단은 유일한 출발점의 역할을 한다. 

 

종교와 세계화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둘 다 서로를 직접 가리키지 않고서는 번영이 무엇이고 우리가 왜 그것을 원하는가 하는 질문에 아예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번영의 촉진에 별 관심이 없는 종교는 영지주의적, 쇼비니즘적 그리고 바리새적이 된다. 또한 오로지 물질주의적 세계화의 형태로만 번영의 개념을 발전시키는 경우에 이 세상은 타락하고 불만족스러우며 억압적인 곳이 된다. 

 

하나님과 이웃 사랑으로 특징지어지는 삶, 번영하는 인간의 삶이 바로 목적이다. 세계화는 우리가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해주는 한 가치 있는 수단이다(16).

 

세상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나는 이 영역을 꽤 오랫동안 탐구했지만, 인간의 번영에서 새로운 깊이를 발견했다. 서론은 매혹적이다. 책을 다 읽고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당신이 만약에 나더러 이 책을 읽고 극찬하는 서평을 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면, 당신한테 미쳤다고 했을 거야. 그런데 아무래도 그래야 할 거 같아!”

 

볼프는 현대 교회에서 심하게 얽힌 많은 신학적 실마리를 풀어낼 뿐 아니라 그 모두를 매우 일관되고 감동적인 신학적 태피스트리로 엮어낸다. 나는 그가 세계화에 대한 위대한 계명을 단순하고 강력하게 적용하는 데에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도움이 되거나 방해가 되는 영역과 관련해서 세계화에 대한 핵심 질문을 추출하는 데에 크게 감동받았다. 

 

서론에는 또한 종교와 세계화에 대한 여섯 가지 훌륭한 논제가 나와 있다. 여기서 볼프는 이 두 가지의 잠재력을 하나로 모을 때 얻을 수 있는 인간의 번영에 대한 엄청난 가능성을 표현하는 동시에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얼마든지 단순한 도구로 축소할지도 모르는 위험까지 신중하게 서술한다. 명확하고 일관된 방식으로 이 책에 제시된 핵심 문제들을 볼 때 안도감과 감사의 마음을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현상태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볼프는 또한 뛰어난 결론에서 이 책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풀어낸다. 초월을 향한 우리의 노력(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번영하는 것)과 번영을 향한 우리의 노력(보이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번영하는 것)을 어떻게 연관시킬까? ”번영 종교“로 전락하지 않고도 번영에 강렬한 관심을 쏟는 신앙이 가능할까? 

 

우리가 평범한 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체험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누릴 때, 세상은 어떤 의미에서 적어도 그때만큼은 완성에 도달한다. 비로소 세상이 하나님이 애초에 창조한 원래의 모습이 된다. …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 담긴 더 깊고 영원한 아름다움과 선함을 기뻐할 줄 모른다. 연인의 선물처럼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으로 여길 때, 우리는 평범 안에서 더 큰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205).

 

이 피조 세계를 떠나야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창조물을 하나님의 선물로서 체험함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난다는(게다가 인간 존재 자체가 피조물이 아닌가) 볼프의 말은 워낙 심오해서 아무래도 예일대 신학과의 또 다른 교수가 거기에 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는 책을 한 권 정도 더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복음은 “종교”가 아니다 

 

서론과 결론만 묶어서 소책자로 출판된다면, 나는 당장 천 권을 사서 주변 모든 사람에게 나눠줄 것이다. 그러나 주요 주제에 대한 가장 좋은 자료가 서론과 결론에만 나온다는 사실은 이 책에 문제가 있다는 징후이다. 이 책은 우리가 피조물이고 피조물로서 번성해야 한다는 통찰력의 의미를 풀어내는 예일 신학자의 책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고 말해야 하는 지금 이 상황이 놀라울 뿐이다. 

 

서술 방식으로 인해서 볼프는 책의 주요 논제를 적절하게 전개할 수 없었다. 서론과 결론에서 그가 취한 건 누가 봐도 기독교의 신학적 접근 방식이다. 그런데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는 세계화를 기독교가 아닌 ”종교“(즉, 주요 세계 종교)와 연결하려고 애를 쓴다. 결국 볼프는 ”종교“라는 매우 추상적인 일반화, 사람으로 하여금 절망을 느끼게 하는 바로 그 상황에 의존해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1부에서 볼프는 종교와 세계화를 연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종교적 세부 사항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그의 주장은 모호하고 진부한 말로 축소되었다. 예를 들어서, 모든 종교는 “그 나름대로 인류의 근본적인 통일성을 가르친다(38), 인간은 ”단순한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상이 아닌 주체로 대우받아야 한다“(47) 정도가 고작이다. 이러한 광범위한 진술이 틀린 건 아니지만, 핵심에 다다르고 실제로 세계화를 개혁하려고 할 때 필요한 구체성을 제공하지 못한다. 

 

상당히 긴 2부는 다양한 세계 종교 간에 평화롭고 조화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방법에 대한 이차적인 질문을 다룬다. 매우 중요하고 밀접하게 관련된 주제이며, 볼프는 거기에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나는 2부에서 매우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심지어 종교적으로 배타적이고 정치적으로 다원주의적일 수 있다는 증거로 기독교 우파를 내세운다! 그 주장에 어떤 확실한 증거가 있는지 여부를 떠나서 매우 대담한 태도이고 그 점에 관해서 나는 볼프에게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이게 이 책이 다루는 핵심 내용은 아니다. 

 

어떤 하나님? 어떤 세계화? 

 

이 책의 방법은 또 다른 문제들을 유발한다. 그럴듯함이 큰 문제다. ”종교“를 광범위하게 일반화한 글을 읽으면서 나는 계속해서 여백에 이렇게 썼다. ”이슬람에 관한 이 이야기가 사실일까?“ ”불교에 관한 이 말이 사실일까?“ ”힌두교에 관한 이 말이 사실일까?“ 볼프가 채택한 방식에 따르면, 우리가 보통 가정하는 내용보다 세계 종교 사이에는 훨씬 더 많은 공통성이 있는 게 분명하다.

 

서론과 결론에서 암시하듯, 기독교는 복음 때문에 결코 많은 동류 종교 중 하나가 될 수 없다. ”올바른 종류의 신에 대한 올바른 종류의 사랑“이 초월과 번영을 올바르게 연결하는 열쇠라고 말한 볼프의 말은 옳다(206). 그러면서 어떻게 동시에 이 책 전반에 걸쳐서 세계 다양한 종교를 광범위하게 일반화할 수 있을까?

 

”종교“를 지나치게 일반화하듯 볼프는 ”세계화“도 지나치게 일반화한다. 그는 모든 현대 정치 및 경제 시스템을 세계화의 한 형태로 묶어 지나치게 광범위한 잣대를 들이대며 설명하는데, 특히 비판에 치중한다. 

 

결과적으로 볼프는 사회학적 현상으로 세계화를 지나치게 취급하는데, 정작 정치와 경제 문제가 내포한 어렵고 분열적인 형이상학적이고 도덕적 문제를 회피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재산이란 무엇인가? 법치주의란 무엇인가? 공동체란 무엇인가?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 공동선이란 무엇인가? 정부와 경제 시스템은 개인과 공동체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각 공동체가 고유한 공동선에 대한 합법적 이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각 특정 공동체의 공동선을 지구의 공동선과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는가?

 

볼프가 이 모든 질문에 다 대답할 필요는 없지만, 이게 얼마나 난해하게 분열적인지, 따라서 그 결과 ”세계화“의 형태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다양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최소한 인식은 하고 있다는 점은 보여주었어야 한다. 어느 시점에서, 그는 세계화가 여러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종교가 단순히 세계화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단언한다. 그가 (모든 형태의) 세계화를 다양한 도덕적 실패, 즉 물질주의적 삶의 관점을 강요하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대립시키고, 환경을 파괴하는 등의 이유로 공격하는 첫 구절을 쓸 때, 바로 이 점을 기억했어야 한다. 볼프 자신이 다른 구절에서 인정했듯이, 모든 형태의 세계화가 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사랑하는 대상만을 개혁할 수 있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큰 실망을 느낀 건 종교와 세계화에 접근하는 볼프식 접근법의 핵심에 자리 잡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갈등 때문이다. 중간중간 종교와 세계화의 상호 의존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더 빈번하게 세계화를 도덕적 기원이나 목적(telos)이 없는, 일종의 자율적인 힘으로 묘사하는 거짓 서사에 빠진다.

 

가장 충격적인 사례는 그가 공산당 선언 속 구절을 ”그 무엇보다 … 그리고 적어도 1세기 동안은 그 무엇보다" 세계화를 더 잘 묘사한다고 주장할 때이다(29). 그는 하나님의 거부와 대량 학살의 씨앗, 즉 인간을 계급적 이익의 단순한 도구로 축소하고, 부르주아를 비인간화하고, 경제적 욕망을 물질적으로 이해하고, 그리고 경제와 종교 사이에 기본적인 대립이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공산주의가 그가 극찬하는 이 구절과 어떻게 융화가 가능한지 보지 못하는 것 같다. 

 

그가 세계화를 칭찬하는 건 오로지 물질적 혜택 때문이다. 도덕적이고 영적 혜택과는 세계화를 거의 연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형태의 세계화가 이방인을 환영하고, 여성을 해방하고, 인종적, 종교적 억압을 종식하고, 평범한 사람과 평범한 삶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보편성을 가진 윤리적 헌신을 하고, 법치주의에 따라 정의를 추구하고, 전 세계 사람들과 공동의 일을 위해 건설적으로 연합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세계화와 종교를 결코 별도의 용기에 넣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볼프가 이 요점을 어디에서는 강조하면서 또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무시한다. 

 

당장 종교와 세계화를 별개의 반대 세력으로 보는 볼프의 서사는 정작 그가 모든 세계 종교에서 공통으로 발견한다고 밝힌 여섯 가지 특징에 의해서 도전받는다. 그는 세계화에 기여하는 종교적 기원에 관한 다섯 가지를 지적한다. (1) 모든 개인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2) 보편적인 진실을 주장하는 것, (3) 평범한 번영을 넘어서는 선을 추구하는 것(세계화가 의존하는 자기 통제와 미덕으로 이어짐), (4) 종교를 별개의 사회 시스템으로 여기는 것(종교적 자유를 가능하게 함), (5) 평범한 현실을 초월성과 연결하는 것이다. 

 

세계화는 숱한 악의 원인이지만, 그 핵심에는 도덕적, 영적 공약(commitments)이 포함되어 있다. 그 이유는 세계화가 대체로 세계 종교,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도덕적 공약은 초기 근대 종교 운동, 특히 종교 개혁과 감리교의 인정받지 못한 유산이다. 

 

종교와 세계화에 대한 볼프의 인위적인 분리는 종교를 세계화가 아닌 무엇으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형이상학과 도덕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볼프는 결코 그게 가능하기 위한 유일한 근원이 종교라는 사실을 보여주지 않는다. 세계화와 관련해서 그가 표현하는 도덕적 목표(빈곤층에게 힘을 실어주고 생태적 보호를 제공하는 것 등)는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모호해서 세속주의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까지 이미 동의하는 내용이다. 

 

볼프가 독특하다면서 제시하는 종교의 유일한 공헌, 그러니까 종교가 단지 유일할 뿐 아니라 실제로 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이유는 종교가 도덕적 개혁에 대한 반대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강력한 세계적 기관”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57). 다시 말해, 볼프는 세계화에 초월성을 제공하기 위해 종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현실적인 이유로 종교에 의존한다. 

 

볼프는 종교가 세계화의 문화적 기관에 사로잡히면 정체성과 신뢰성을 잃는다고 경고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정작 그는 그런 기관에 반대하는 권력 정치의 도구로 종교가 축소되는 경우에 발생하는 동일한 위험에 관해서는 제대로 모르고 있다. 또한 만약에 종교가 관련한 기관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순간, 그들은 지금까지 전례가 없었던 방식으로 명백하고 의도적으로 종교에 반기를 들 것이라는 사실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만을 개혁할 수 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바꾸기 전까지 세계화는 단지 비도덕적인 서사 모음에 불과하다는 게 우리의 출발점이 된다면, 우리는 사랑으로 시작할 수 없다. 따라서 변혁적 영향을 미칠 수도 없고 고작해야 권력 투쟁에만 몰두하게 될 뿐이다. 

 

발전의 희망을 보다 

 

좋은 소식은 이 책이 앞으로 이 분야에서 볼프에게 큰 미래(promise)와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는 오랫동안 막스 베버(1864-1920)와 존 롤스(1921-2002) 같은 세속적 좌파의 출처에서 무비판적으로 자료를 가져다가 정치와 경제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 옹호에 치중해 왔다. 나는 그의 마지막 책 ‘광장에 선 기독교(A Public Faith)’에 대한 서평에서 이 부분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했기에 굳이 반복하지 않겠다. 

 

인간의 번영 일부에서 표현된 세계화에 대한 보다 건설적인 접근 방식에 대한 열망이 보여주는 바는 볼프가 동시대의 다른 많은 기독교 사상가와 마찬가지로 유물론적 생각을 극복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남은 문제는 교회의 미래에 대한 큰 의문이다. 세속적 좌파의 영향에서 회복 중인 볼프와 같은 지도자들이 정치 및 경제 시스템의 기원, 동기 및 본질적인 목적은 항상, 그리고 순전히 유물론적이고 비도덕적이라는, 지금까지 그들에게 소중했던 그 서사를 버릴지 말지 여부가 바로 거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서사를 버린다면, 그리고 또 다른 지도자들도 비슷한 수준에서 포로로 잡혀있는 세속적 우파를 극복할 수 있다면, 그들은 현대 세계에서 정의와 자비의 고양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우리는 과연 개혁하고 싶을 만큼 세계화를 사랑할 수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출처: Why Do We Need Relig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