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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제목 | 종교는 어떻게 세계를 선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가? | ||
| 분류 | 예술과 문화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4-0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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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어떻게 세계를 선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가?
내가 번역한 책_인간의 번영 by 양혜원 2024-08-02
지금까지 백 여권에 달하는 책을 번역했지만, 책의 제목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제목을 다는 센스가 부족하기도 하고, 책을 파는 것은 출판사이니 적절한 제목은 그쪽이 시장 상황에 맞춰 잘 팔릴 만한 것으로 택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영어 제목의 번역인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인 미로슬라브 볼프의 인간의 번영도 영어 제목(Flourishing: Why We Need Religion in a Globalized World)의 번역인 셈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한국어로 다소 어색하게 들릴 수 있음에도 이 번역대로 제목이 정해졌고, 그렇게 하는 데에 내가 어느 정도 일조했다. 번영을 주로 물질의 축복과 연관해서 이해하는 통념에 대한 반전으로서 이 표현을 기독교와 연관해서 쓸 필요가 있다고 나는 제안했는데, 일종의 전복적인 언어 사용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번영을 다르게 말하면 곧 잘됨이고, 그것을 기독교적 용어로 표현하면 샬롬일 것이다. 이 샬롬을 세계화의 상황에서 어떻게 정치적으로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 책의 핵심 내용이다. 원어인 영어판 출간(2016년 1월)과 큰 시차 없이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고(2017년 5월), 번역서 출간 후에는 크게 토론회도 열려서 역자 자격으로 참가한 적이 있다. 그때 받은 인상은 독자들이 이 책의 현실적 적용은 차치하고 내용을 따라가기도 벅차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이 번역서의 배경과 내용을 간략히 다루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기독교와 여성주의의 서로 다른 길에 관해서 이야기한 지난 글(“다른 길, 다른 풍경”)에서, 세상과 한목소리가 되어 교회를 때리지 않고 교회를 옹호한다고 교회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은 이야기를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그런 분위기로 흐르던 시기에 이 책이 번역 출간되어 교회 비판에 한몫했다. 이것을 아이러니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 책이 기독교를 포함하여 종교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방향으로 서구의 학계가 크게 전환하는 흐름 가운데 나온 책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말부터 이미 학자들은 종교는 점차 사라지고 세속 사회가 자리 잡을 것이라는 근대의 예견이 틀리게 돌아가는 현상을 인정했고, 21세기에 들어서는 왜 종교는 여전히 번창하는가로 연구 질문이 바뀌었다. 볼프의 이 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그리고 이 세상이 번영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필요함을 기독교의 입장에서 역설하는데, 그의 주장이 기독교의 비전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다분히 선교적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한국에서는 이 책이 기독교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왔기에 이러한 평가에서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좀 이례적인 평가인데 그 이유는 이 책의 원서가 기독교 출판사가 아닌 예일대학교 출판사(Yale University Press)에서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다소 거친 분류이기는 하지만 영미권에서는 그리스도교를 신학교에서 연구하면 신학이 되고, 인문대학에서 연구하면 종교학이 되는데,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포교 즉 선교 사명을 드러내느냐 드러내지 않느냐이다. 쉽게 말하면, 신학교에서는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낫다는 신념과 이 신념을 확산시키려는 의지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으나, 인문대학에서는 그리스도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동일 선상에 놓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면서 연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온 평가이기에 좀 이례적이라고 말한 것인데, 이 책의 서문에서 볼프가 자신의 오순절/복음주의 신앙 배경을 밝히며 자신이 어떤 신앙의 지점에 서서(“Where I Stand”) 이 책의 내용을 논하는지를 말하는 점도 그만큼 달라진 학계의 분위기를 감지하게 해준다.
이 책의 핵심을 가장 쉽게 한마디로 요약하면, 보수적 가치를 지지하는 그리스도인도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를 바꾸지 않고 정치의 장에서 그 가치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이런 당연한 말을 하려고 이렇게 두툼한 책을 썼나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정당성은 진보적 가치가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진보적 가치를 가지고 정치의 장에서 싸우는 것은 선한 일이고, 보수적 가치를 들고 정치의 장에 들어오는 것은 정치를 오염시키고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시즌마다 빨간색을 응원하는 노인들을 향해 보내는 소위 의식 있다고 자부하는 시민들의 시선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나아가, 이 진보적 가치는 세속의 가치이고 보수적 가치는 종교를 대변하는 가치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앞서 언급한 변화의 흐름이 있기 전까지는 학계를 포함하여 전 사회, 특히 서구 사회는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우리는 국가와 종교(교회)의 분리는 사회가 진일보한 현상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다분히 서구의 영향으로서, 이슬람 국가들이나 일본 같은 경우처럼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다고 보기 힘든 사회들이 있으며, 이들 사회, 특히 이슬람 사회의 반격이 오늘날 학계의 변화에 큰 몫을 했다. 하지만, 미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동유럽 출신의 볼프는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좋은 것으로 보는 관점을 전제하고 논의를 하는데, 다만 그는 국가와 종교의 분리가 곧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종교가 곧 국가 권력이 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종교는 언제든지 정치에 참여해서 시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종교에 기반한 가치도 정치적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국가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규범에서 비롯되지만, 영미와 유럽의 국가들도 사실상 여전히 종교적 가치에 의지해서 가정과 사회의 질서를 도모했다는 것이 미국의 명망 있는 페미니스트 역사학자의 연구 결과이기도 하다. 보수적이고 시대에 역행하는 것으로 종교를 전반적으로 폄하하는 것 자체가 서구 사회의 오만이라고 보는 견해는 지금까지 학계가 학문의 방법으로 치켜올렸던 비판적 사고에 대한 재고로도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종교는 비판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는 편견에 대한 비판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비판적 사고만이 유일하게 타당한 학문적 방법이라는 전제에 대한 도전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또 쓸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각설하고, 이 책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한국 복음주의권이 겪은 혼란은 이러한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정치적 정당성은 진보적 가치만이 가질 수 있다는 암묵적 전제를 뒤집지 못한 채 이 책을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은 정치적 장에서 자신들도 발언할 자격이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성경도 진보적 가치를 지지한다는 것을 입증하려 애를 썼고, 그런 견해를 따르지 않는 보수적 교회를 비판했다. 내가 저들, 보수적 교회와 같지 않음을 애써 주장하여 세속 사회로부터 정치적 인정을 받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볼프의 요지는, 보수적 가치에 대한 신념 그대로 정치의 장에서 발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발언의 방법과 전략, 그리고 시민의 지지이다. 다시 말해서, 진보의 언어로 바꾸어야만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볼프가 “정상” 가족의 가치를 지지하는 미국의 보수 복음주의 집단의 정치적 참여를 구체적인 사례로 든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자신이 믿는 바가 사회적 선에 기여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다면, 그 신념의 근거를 잘 정리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시민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 정치 방법의 기본이다. 볼프는 그것을 잘 익혀서 실천하는 종교 집단의 사례로 미국의 복음주의 그룹 하나를 제시했다.
이 책에서 사용하는 종교적 배타주의와 정치적 다원주의라는 용어가 좀 어렵게 들릴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이 바로 이 용어의 의미이다. 볼프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정치적 다원주의를 인정하기 위해서 종교적 다원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종교적 배타주의—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하나라는 신념—를 포기하지 않고도 정치적 다원주의를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을 기독교 역사의 사례를 통해서 입증한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배타적 종교를 믿는 사람도 정치적 다원주의를 인정하면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이고, 정치적 다원주의자는 종교적 배타주의자를 종교적 다원주의자로 만들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을 또 한 단계 더 풀어서 말하면, 종교를 진보 가치로 포장해야만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의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많이 헷갈려 한 것 아닐까.
정치하면 곧 진보로 연결 짓는 이 공식 때문인지, 번역 용어 하나를 놓고 사소한 갈등도 있었다. 이 책에서 쓰는 ‘globalization’이라는 용어를 나는 ‘세계화’로 번역했었다. 이 용어가 처음 수입되던 1990년대 초중반에는 국제화, 세계화, 지구화 등의 번역어들이 있었는데, 점차 세계화라는 번역어 하나로 정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집부에서는 좀 더 진보적인 의미를 담아서 ‘지구화’라는 용어를 쓸 것을 제안했다. 학술적으로도 ‘지구화’를 더 많이 쓴다는 견해였는데, 한국어 학술 논문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한 결과는 그렇지 않았음에도, 계속 ‘지구화’를 주장하기에 내가 물러섰다. 번역에 관해서 쓴 지지난번 글(“번역의 사명”)에서도 말했지만, 결국 클라이언트의 의도대로 가는 수밖에 없는 게 번역가의 숙명 아니겠는가.
마무리하자면, 결과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회 전체의 선을 위해서 자신의 신념 체계가 다른 사람의 신념 체계보다 더 낫다고 확신한다면 그것을 실천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볼프는 여러 신념 체계 사이의 이러한 선의의 경쟁을 제안하는데, 각 종교가 주장하는 인간 번영의 개념을 정리하여 같이 논의하면서 세계화를 선한 방향으로 이끌 모색을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실천을 제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선한 영향은 떼로 몰려 구호만 외치는 데서 일어나지 않고 선한 실천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어떤 가치로 정치의 장에 참여하건, 사랑의 수고가 동반된 구호와 그렇지 않은 구호를 잘 분별하는 것도 필요한 안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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