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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제목 교회 공동체를 위한 형상 신학
분류 교회
작성자 전체관리자 작성일 2024-07-31
첨부파일
교회 공동체를 위한 형상 신학
by 최창국 2024-07-29

기독교 역사를 보면 성화와 성상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다. 예수님의 초상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대상으로 전락시켜 비렸다며 비판했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같은 교부의 말을 통해 성화와 성상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놓은 테르툴리아누스는 예술품이 사탄의 영가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당시 예술 활동이 주로 이방 종교와 관련되어 나온 사실 때문에 생긴 것이다. 교부 시대 이후에도 츠빙글리는 그림, 조각, 벽화 같은 시각 예술을 모두 교회에서 제거해 버렸다. 일부 청교도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형상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시각은 다양한 차원에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지만, 십계명의 형상 금지 조항에 대한 오역에서 기인한 측면도 있다. 특히 십계명의 형상 금지 조항,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며”(출 20:4)의 내용을 하나님에 대한 그 어떤 구체적인 상도 금지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조각상과 같은 예술 작품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계명은 본래 일반적 의미에서 예술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제의 신상 경배와 관련이 있다. 또한 이 계명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상상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십계명의 형상 금지의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형상 금지를 통해 신성불가침을 보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형상 금지의 참뜻은 신들처럼 행동하거나, 사람들에게 충만한 생명 대신 의존적으로 만들고 치명적 위험으로 유도하는 권세와 권능의 대리물인 상징을 비판하는 데 있다(실비아 슈뢰어, 토마스 슈타우블리, 성경과 몸의 상징학, 166-67). 따라서 이 계명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예술적 표현을 금지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오트마 킬에 따르면, 성경에서 형상을 만드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형상을 부여하고 하나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한 모든 시도를 금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없이 그리고 어떤 접근성 없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존재하는 교감은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이다”(Othmar Keel, The Symbolism of the Biblical World, 178).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표현한 것도 물질을 통한 형상 표현의 전통에서 연유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의 은유는 근동지역에서 왕이 대사의 손에 왕의 형상이 새겨진 메달을 쥐어주면서 ‘그대가 변경 땅이나 외국 땅에 가거든 이것을 보여 주라. 이 형상은 내 뜻을 전하라는 그대에 대한 나의 위탁이고 권한 부여이다’라고 말하던 관습에서 온 것이다”(더글라스 믹스, 하느님의 경제학, 121).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는 어떤 특정한 속성을 소유한 상태와 관계되기보다는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 직무와 관계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말하고 이름을 짓는 것, 의로운 심판을 하는 것, 창조주의 모든 피조물의 복지를 위한 열매가 가득한 관대함을 보여 주는 것 등을 통해 권한을 행사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반 루이벤에 따르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표현한 것은 인간이 세상을 건설하는 것, 즉 도시, 집, 성전 등을 건설하는 인간의 임무와 수고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왕상 6:37; 대상 17:24 등).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집을 짓고, 어떤 것을 창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대한 인간의 모방이다(Van Leeuwen, Proverbs, 53-54).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은 창조자이므로 인간도 하나님의 하위 창조자가 될 필요와 의무가 있다. 인간의 창작 활동은 하나님의 하위 창조자로서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의 성육신은 형상 또는 예술 신학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형상이신 그리스도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로고스이면서 형상이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의 보이는 형상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귀로만이 아니라 눈으로도 그를 만난다. 바울은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골 1:15)라고 말한다. 따라서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성육신하신 하나님, 형언할 수 없는 선하심으로 인간들과 함께 사셨으며, 육신의 특성, 크기, 형상, 색을 취하셨던 하나님, 그분의 형상을 우리가 만든다고 해도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제레미 벡미 편집, 예술을 통한 신학: 예술로 표현되는 성육신, 39).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십자가 형상처럼 예수님, 성경의 인물들, 거룩하고 덕망 있는 사람들의 성화와 성상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형상이 우리 눈에 들어올 때, 우리는 그 원형들을 기억하고, 더 사랑하고, 본받고 싶은 열망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망은 성화와 성상의 이미지 자체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성화와 성상에 묘사된 원형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육체성과 물질성을 취하셨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육신은 영적 의미뿐 아니라 육체와 물질의 가치와 물질적 표현의 중요성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우리가 말씀이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할 때 예수님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듯이, 형상이신 예수님, 즉 예수님의 육체성과 물질성을 간과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없다. 플라톤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많은 사람은 육체성과 물질성을 인간 삶의 여정에서 장애물로 여겼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육체성과 물질성을 소중하게 여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적이고 물질적 표현에 충격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노동, 예술, 발명의 다양성을 소중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재와 우리의 다양한 현실을 모두 아신다. 

 

우리가 어떤 물질을 가지고 예술 작품을 만드는 행위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지만, 특히 이러한 행위는 이 물질성 안에서 그리고 이 물질성을 통해 물질 이상의 것을 알게 된다. 특히 우리가 예수님의 성화와 성상을 만들고, 그 작품을 보며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은 영적 삶에 깊은 통찰력을 줄 수 있다. 예수님의 성화와 성상과 같은 예술 작품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형상은 실재보다 크거나 실재를 능가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가 예술 작품을 볼 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깊은 영감을 제공하거나 자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 작품의 물리적 존재를 본능적으로 깊이 깨닫게 하는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예수님의 성상도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신성함을 충만하고 완전하게 표현해 낼 수는 없다. 오직 살아계신 그리스도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하위 창조자들을 통해 만들어진 예술 작품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말씀이며 형상이신 예수님의 형상을 통해 묵상하며 기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