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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제목 | 영화롭고 아름답게 | ||
| 분류 | 그리스도인의 삶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4-0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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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롭고 아름답게
by 서나영 2024-08-19
워라밸과 미라클모닝을 고민하는 도시 청년들과 나누는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다이어트와 퍼스널컬러 찾기에 진심인 젊음의 에너지는 하나님의 자녀로 우뚝 서겠다는 그들의 다부진 마음과 별개가 아니다. 집에서 이미 고인이 된 신학자의 글을 읽고 사랑에 빠졌다가 어느 날은 실망하고 헤어짐을 고하고 또 다시 만나 사랑하는, 나름 다이나믹한 나의 루틴과는 전혀 다른 신학적 현장감이랄까. 사랑과 가치와 의미를 찾아 노력하고 고민하는 그들의 모든 날갯짓이 역동적이고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안과 밖이 모두 아름다운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고(故) 장영희 박사의 칼럼집에서 깊이 공감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릴 적부터 소아마비를 앓았던 그녀가 서강대 영문학 교수로 재직 중의 일이다. 동생이 쇼핑하러 가자고 졸라서 따라 나선 명동의 한 옷가게 문턱이 너무 높았고, 혼자 매장 밖에서 피팅룸에 들어간 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별안간 옷가게 사장이 나와 ‘지금은 돈이 없으니 나중에 오라’며 반복해서 소리를 질렀고, 무슨 뜻인줄 몰라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동생이 나와 상황을 해결했다는 짧은 이야기다. 장영희 박사는 화장기 없는 중년의 나이에 허름한 옷을 입고 목발을 집고 있으니 거지로 오해 받을 만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날 이후 옷도 사고 간단한 화장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녀의 단정하고 반듯한 아름다운 내면의 빛깔을 밖으로 조금이나마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 일화를 통해 남편에게 자주 한탄하던 습관 하나를 고쳤는데, ‘화장이 너무 하기 싫은데 결국 강의 전에 화장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한심하다’는 반복적인 탄식이었다.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모든 생각과 행동은 반드시 겉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과 공동체에 영향을 끼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모든 반응과 믿음도 또한 언어와 모습과 행실을 통해 드러난다. 반대로 절망과 슬픔과 무기력 같은 부정적 상태도 그렇다. 그 어느 생각과 사상도 영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환상이나 망상이 될 것이고, 반대의 경우에는 거짓이나 위선이 될 뿐이다.
지난 달 프랑스 올림픽 개막식에 보인 예술 행위는 프랑스가 지닌 미의 기준과 실체를 일치시키는 데 나름 성공했다. 인간의 자유를 목숨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겨온 전통 아래 인간을 자유롭게 할 ‘정치의 자유’와 ‘성의 자유’를 동일하게 여기는 사상을 표현했는데, 결국 ‘술의 신 디오니소스’만이 인간의 자유를 가능케 한다는 믿음을 화려하게도 드러냈다. 그들이 전 세계에 동시에 방영하며 얻은 파장과 효과는 슬프게도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예수님의 자리에 동성애자를 앉힌 최후의 만찬 그림 패러디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신성모독’이라는 무수한 비판밖에는 할 말이 별로 없는 기독교 지성에 나 또한 반성하며 (사실 최후의 만찬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유명한 동성애자였다) 인간의 자유와 행복과 아름다움에 대해 뜨겁게 고민한 여름이었다.
이 시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을 품고 드러낼지, 고민이 필요하다. 매력 넘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거부할 수 없는 좋고 선한 가치들이 많이 있다. 대중의 여가 시간을 책임지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들여다보면 ‘외모’가 독보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이며, 정치에서는 ‘통제권’이, 예술계에서는 ‘몰입감’이, 경제를 움직이는 돈의 세계에서는 ‘럭셔리한’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삶에 있어 높은 점수를 받는 듯하다. 또한 AI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는 이 사회는 인간의 높은 ‘지능’에 좋은 미학 점수를 주는 것 같다. 기독교의 흑역사 중 한때 유럽과 미국을 휩쓸었던 ‘우생학’에는 미국에서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출간한 우생학 교리문답집(A Eugenics Catechism, 1926)이 있었다. 지능으로 인간 등급을 정한 끔찍한 역사의 중심에 교회가 있었고, 여전히 다른 여러 모양으로 오늘의 교회 또한 다양한 기준을 수용한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또는 ‘문화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자랑하기 위해, 많은 이유로 문화 가운데 최고의 미적 가치들을 섭렵하기에 바쁜 것 같다.
챗GPT가 이슈가 될 무렵 한 독서모임에서 각자 다른 영역의 학자들과 AI와 기독교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다. 그리스도인 박사들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뛰어난 지능으로 인공지능을 다스려야 한다는 합리적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던 중 한 과학교육학 박사가 ‘인간’이 되기 위한 조건에 대해 질문을 던졌는데, 그의 두 살배기 아기가 생후 3개월 때부터 뇌전증과 혈우병을 앓으며 아무런 말도 표정도 없이 그저 크기만 자라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성경적 인간론’의 주제로 돌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가치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돌려 받지 못할 사랑을 쏟을 수밖에 없는 장애인을 둔 부모와 보호자, 숨어서 방 밖에 나오지 않는 54만 청년들의 가족, 늙고 병들어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들의 가족. 그들에게 아름다운 인간에 대한 기준 설정은 잔혹하기 그지없다.
시골교회 목사의 딸로 자란 어린 시절 풍경을 떠올려보면, 아름다운 인간을 상상하고 추구하는 일은 사치에 불과했다. 집에 귀신이 있다며 때만 되면 한밤중에 사택 현관을 두드리고 가족이 자고 있는 안방으로 뛰쳐 들어오던 여자, 교회에서 기도 많이 했으니 기도 값을 달라던 남자, 남편 사망보험금을 잔뜩 부어가며 금요철야예배 시간만 되면 만취한 상태로 교회에 들어와 남편이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여자, 집에 매일 찾아와 양자로 삼아 달라고 조르다가 교회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변태짓을 하던 지적장애 청년 등등. 주님의 교회 한가운데에서 그저 “정상적 인간”으로 살 수 있기 만을 소망했었다.
시간이 쌓이고 돌이켜보니 인간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것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기준도, ‘지성과 지혜’의 크기에 대한 기준도 아니었다. 자존감의 크기도, 타인에 대한 이해 정도도, 용기와 카리스마의 유무도 아니다. 아름다운 외모의 기준은 바뀌어 왔고, 올바른 인간관을 세우려는 노력은 심리/자기계발서를 포함해 방대한 이론과 양으로 우리를 옥죄어 자주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성경 속 아름다움에 대한 가르침은 ‘여호와를 경외함’이라는 마음의 방향과, 가장 ‘아름다운 소식’인 복음과 연관되어 있다. 특히 바울의 가르침은 아름답고 선한 행실을 구체적으로 연구하게 한다.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고 예배와 순종과 믿음의 행위를 아무리 많이 추구하고 집중해도 모자라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과정에서 너무 자주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고 하고, 곧이어 지나친 종교 행위로 그 진리의 길을 오히려 가로막게 되는 일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모이면 아름다움은 커녕 언제나 반드시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난다. 마치 종합병원의 풍경처럼, 가벼운 감기 환자부터 말기 중증 환자까지, 저마다 회복을 꿈꾸며 치유의 손길을 기다리며 예민해져 있다. 건강해 보이는 사람도 아직 병명이 진단되지 않았거나 별 증상 없이 잠복하고 있을 뿐, 교회 바깥 사람들은 물론 이러한 영적 공동체는 병을 진단하시고 치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 외에는 소망이 없다. 교회는 아름다운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인간의 추함을 진단하고 드러내는 곳에 더 가깝다.
그래서인지 교회에서 자랐던 나에게 살면서 가장 어려운 두 가지는, 나 자신이 안밖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일이다.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하나를 놓치거나 둘 다 실패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눈과 마음에 잊혔거나 분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 마흔이 지나서야 바울이 유대인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끔찍이 사랑했는지 보이기 시작했고, 수년을 흠모하던 신학자의 미출간 원고까지 읽고서야 그도 나와 같이 흠 많은 사람임을 보았다. 사람에 대해 해결될 수 없는 분노를 반복하여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깨닫지도 못하는 자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사랑이었는지, 흐릿하게나마 느껴본다. 가늠할 수 없는 ‘우리의 죄의 크기’와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는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되는 아름다움의 기준이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아론과 제사장들이 입을 옷을 특별하고 아름답게 디자인하셨다. 이유는 그들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였다(출애굽기 28:2, 28; for glory and beauty).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영화롭게 바라보기로 하셨고, 오늘을 사는 우리 또한 예수님의 공로로 인해 동일하게 아름답고 빛나는 옷을 입은 “왕 같은 제사장”(베드로전서 2:9)이 되었다. 왜 아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 왜 영화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평생 매일을 질문해야 한다. 제사장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아름답지 못한 자들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다. 가난하고 포로된 사람, 눈멀고 눌려 있는 사람들(누가복음 4:18)에게 다가가는 자들이다. 영화로운 옷만큼이나 아름다운 내면의 말씀과 성령의 빛을 드러내며 걸어가기를 기도하며, Soli Deo glo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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