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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제목 팀 켈러의 신칼빈주의
분류 교회
작성자 전체관리자 작성일 2024-08-15
첨부파일
팀 켈러의 신칼빈주의
by Tim Keller 2024-08-12

켈러 문화변증 센터 The KELLER CENTER  

 

 

 

이 글은 T&T Clark Handbook of Neo-Calvinism에 실린 팀 켈러의 글, “Pastoral Ministry”를 간추린 것이다. 

나는 스무 살에 IVF 사역을 만나서 개종했다. 내가 만든 InterVarsity 그룹의 북 테이블을 보면 영국 복음주의 경건주의의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프랜시스 쉐퍼와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 미술 교수의 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난 건 쉐퍼 책에서였지만, 세계관이 다르면 다른 예술 작품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 건 한스 로크마커(Hans Rookmaaker)의 현대 예술과 문화의 죽음(Modern Art and the Death of a Culture)을 읽고 나서이다. 내게 신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만 이해되었다. 그런데 신학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삶의 모든 부분까지 다 바꾸어야 하는 걸까? 로크마커의 대답은 실로 엄청나게 확고한 ‘그렇다’였다.

 

로크마커는 1948년에 쉐퍼를 만났고, 쉐퍼의 신칼빈주의 관점이 로크마커라는 미국 근본주의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쉐퍼는 스위스에서 라브리를 설립했는데, 그건 오래 지나지 않아서 불만과 영적 의심을 품은 젊은 성인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개방적인 기독교 공동체가 되었다. 로크마커는 그 사역에 적극적이었고 네덜란드에서 라브리 지부를 시작했다. 대학 시절에 이들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적어도 신칼빈주의의 두 가지 교리를 배웠다.

 

1. “우리는 정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이어야 한다.” 세상은 우리가 물러나야 할 대상이 아니다.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 교리에 기반을 두면서도 우리는 현대 세계의 모든 측면에 참여해야 한다.

 

2. “기독교는 세계와 삶에 대한 관점이다.” 기독교 믿음은 세계관을 구성하며, 예술, 사업, 정치, 시민 생활, 가족생활, 교육 등 삶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를 독특하게 행동하도록 만드는 방법이다. 우리는 세상 속 모든 분야에서 비그리스도인과 함께 그리스도인만의 독특한 사고방식, 말하기, 행동 방식을 표현해야 한다. 

 

신칼빈주의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기 

 

1972년 가을에 나는 고든-콘웰 신학교에 입학했다. 거기서 특히 스위스 개혁신학자 로저 니콜(Roger Nicole)의 가르침을 받으며, 나는 신칼빈주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니콜이 주 교재로 쓴 건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이었는데, 그 책은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을 밀접하게 추적한 내용이다. 벌코프의 신학은 가치 중립적 지식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이성이라는 기초에 근거해서 신앙을 바라보는 찰스 하지(Charles Hodge)의 신학이 아니라 바빙크의 신학처럼 신앙이라는 기초에 근거해서 이성과 추론을 바라보는 인식론을 전제로 한다.

 

니콜은 또한 우리에게 바빙크의 개혁교회학 중 당시 영어로 번역된 유일한 부분인 Doctrine of God(하나님 교리)와 그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The Wonderful Works of God)의 영어 번역본인 우리의 이성적 신앙(Our Reasonable Faith)을 읽도록 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나는 신칼빈주의의 다른 네 가지 측면을 알게 되었다. 

 

1. “은혜는 자연을 회복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죄가 초래한 모든 결과, 즉 영적, 심리적, 사회적, 육체적, 그리고 문화적 치유에 이르기까지, 악이 훼손한 창조세계의 모든 부분의 회복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창조와 구원의 목표는 같다. 서로 사랑하는 구체화된 영혼으로 가득 찬 완벽한 물질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구원에 대한 이런 우주적 관점은 그리스도인이 단지 복음 전파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악과 정의를 위해서까지 일하도록 만든다. 

 

2. “대립도 있지만 일반 은총도 있다.” 죄가 초래한 결과(롬 1:18-32)로 인해 사람들은 더 이상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다. 대안적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와 다르기 때문에 세상의 사고 체계와 기독교 사이에는 항상 근본적인 대립이 발생한다. 그러나 일반 계시와 일반 은총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조차도 자신의 세계관과 일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는다. 따라서 우리는 분노에 찬 비난이나 타협 없이 얼마든지 불신자들을 존중과 비판으로 대할 수 있다. 

 

3. “기독교는 머리와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 복음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 방식이 오로지 합리주의에 치우친 것도, 그렇다고 단지 선언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불신자들도 스스로 억압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다(롬 1:18-32). 복음주의는 그들이 보여주는 가장 좋은 직관과 나머지 세계관 사이의 불일치를 지적한다. 복음주의는 그들의 열망을 긍정한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여 “머리”(공언하는 믿음)가 마음과 일치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다. 

 

4.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성경을 주제별로 또 조직신학적 방식으로 읽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그렇기에 복음은 “하나님-죄-그리스도-믿음”이다) 연대순, 구속사적 방식이라는 통시적 방식으로도 읽어야 한다(따라서 복음은 또한 “창조-타락-구원-회복”이다). 이는 구속사의 단계들로 따라잡을 수 있는 성경을 관통하는 모든 주제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지를 보여준다. 

 

교파 긴장이 주는 가치

 

고든-콘웰을 졸업하고 나는 새로 설립된 미국 장로교회(PCA)의 목사로 안수받았다. 그곳에서 나는 모든 칼빈주의자가 다 똑같지 않다는 것을, 더 나아가 종종 서로를 두려워하고 심지어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는 부분적으로 실천에서 드러나는 세 가지 다른 충동이나 강조점 때문인데, 조지 마즈던(George Marsden)은 이를 “교리주의자”, “경건주의자”, “문화주의자”로 구분했다. 

 

긴장에도 불구하고, 미국 개혁파 기독교의 여러 “진영들(wings)”의 특징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PCA와 같은 교단에 속한다는 건 이점이 있다. 각자를 가까이서 볼 수 있으므로 강점과 약점을 더 잘 인식할 수 있다. 나는 경건주의와 신칼빈주의를 섞어서 마시면서 PCA에 들어왔다. 목회 초기 나는 교리주의자 진영 덕분에 내가 신앙 고백 문서에 충분한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준 도전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부흥주의 진영과 신칼빈주의 진영, 양쪽의 교리적 비판도 들을 수 있었다. 

 

선의의 비판을 들으면서 나는 신칼빈주의의 단점, 적어도 미국에서 형성되고 있는 신칼빈주의의 단점은 잘 볼 수 있었다. 첫째, 신칼빈주의는 직업을 통해 문화에서 소금과 빛이 되는 평신도의 역할을 매우 강조한다. 따라서 지역 교회와 목회자 사역의 중요성이 제대로 강조되지 않았고 그 결과 전임 사역자의 길로 들어서려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하는 게 힘들어졌다.

 

둘째, “세계관”이라는 개념은 종종 심각할 정도로 인지적 용어로만 인식되었다. 즉, 마음에 떠오르는 사랑의 순서나 세상을 상상하는 방식보다는 요점만 적어놓은 신념의 집합처럼 여겨졌다. 

 

셋째, 이와 관련하여 신칼빈주의는 기독교 생활에 대한 지적이고 철학적인 관점을 투사했다. 그 결과 신칼빈주의가 고학력 전문가를 뺀 일반 그리스도인과는 별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을 뿐 아니라 내적인 기독교의 경험, 하나님과의 교제, 기도를 통한 신앙 성장 또는 성령의 능력은 제대로 강조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북미의 신칼빈주의는 문화를 근본적으로 “구원할”뿐 아니라 변형하겠다고 약속한 “문화 변혁주의(cultural transformationism)” 운동과 동일시되었다. 미국의 기독교 우파 운동의 일부는 “문화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권력 전략과 관련해서 아브라함 카이퍼를 인용했다. 신칼빈주의 집단의 또 다른 일부는 기독교를 좌익 정치 운동에 결합하고 성적 취향과 성별에 대한 세속적 견해에 동조하게 했다. 교리주의자들의 우려, 즉 신칼빈주의자들이 “문화에 다가가기” 위해 신앙의 정통성을 타협하는 경향이 있다는 우려는 어느 정도 타당했다.

 

신학적 통합

 

내가 문화주의적 강조에 기울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목회하는 내내 PCA 내부의 긴장은 나로 하여금 개혁 기독교의 경건주의와 교리주의로부터 다양하게 좋은 부분을 끌어와서 활용하도록 자극했다. 

 

내게 큰 도움을 준 자료 중 하나가 다름아니라 신칼빈주의자들이 종종 무시하거나 비판하는 그룹인 영국 청교도들의 책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존 오웬, 토마스 브룩스, 존 플라벨, 스티븐 차녹, 리처드 십스는 하나님과의 교제뿐 아니라 일반적인 “영성”이라는 문제에 관해서 나의 이해와 경험의 폭을 확장하는 데 깊은 영향을 미쳤다.

 

교회의 경건주의 진영은 내게 조나단 에드워즈와 다른 몇몇 부흥주의를 소개했다. 나는 부흥주의를 거부하지 않았지만, 부흥주의에 관한 교리주의의 비판 내용은 나로 하여금 영적 쇄신의 역동성 적용이라는 측면에서 확실하게 목회적 방향 전환을 하도록 만들었다. 

 

내 친구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가 쓴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To Change the World) 덕분에 나는 문화적 변화의 현실과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았다. 이를 통해 우리 리디머 교회는 문화적 쇄신을 포기하지 않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빠르고 직접적인 사회 변화에 대한 승리주의적 주장도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신칼빈주의자이다. 하지만 아주 근소한 차이로 따라오는 두 번째 입장은 부흥주의-경건주의-복음주의자이며, 세 번째로는 우리 고백서에 구현된 개혁 신앙의 단 한 부분도 버리거나 누그러뜨리거나 폄하하고 싶어 하지 않는 교리주의자이다. 나는 이 세 가지 강조점이 내가 속한 교단 내에서 종종 상충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지속 가능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사역 철학을 여기 맨해튼에서 펼치도록 도움을 주는 교단에 깊이 감사한다. 

 

 

출처: Tim Keller’s Neo-Calvin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