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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제목 간판 위 비둘기
분류 그리스도인의 삶
작성자 전체관리자 작성일 2024-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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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 위 비둘기
by 필립 정 2024-09-10

앳된 얼굴에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누구나 반갑게 대하는 종복이를 만나러 가는 중에 한참을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차창을 열자 대지를 식힌 흙 내음의 바람이 콧속까지 적셔왔다. 종복이는 너른 호수와 흐드러지게 꽃피는 언덕에 자리 잡은 전원도시에서 조그만 식당을 하는 마흔 갓 넘긴 청년이다. 세상 물정을 아직 모르는 건지 두려움이 없는 건지 한결같이 밝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그가 처음에는 좀 속이 없어 보였다. 스무 살 차이도 더 나는 나에게 처음부터 “형님” 하며 다가올 때는 당황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거리를 두기까지 하였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밥 한 그릇이라도 팔아준다는 핑계로 종종 얼굴을 보는 사이가 되었으니 그와의 사이에 이제 더 파헤쳐야 할 속내 따위는 남아있지 않다. 그와 얘기하면 생계에 대한 압박감을 떨치고 실컷 웃다가 돌아와 꿈속으로 소풍 가듯 잠드니 그를 찾는 것은 안식같이 되어 버렸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생겨 두 달 전 내게 도움을 청해 왔다. 

 

종복이네 식당 입구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와 어울리지 않게 항상 더럽혀져 있었다. 간판위에 십여 마리의 비둘기들이 둥지를 틀고 사는데 그들이 매일 배설물을 쏟아내어 식당 입구가 항상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매일 아침 손님이 오기 전에 물로 씻어 내지만 퍼렇고 허옇게 말라붙어 산화된 콘크리트는 좀처럼 말끔해지지 않았다. “형님, 저 비둘기들을 못 오게 할 수 없을까요?” 

 

그의 청을 받고 사다리를 차에서 내려서 가게 간판 위에 걸치고 올라가 보았다. 꽤나 높이 올라가니 간판 뒤에 상당한 너른 공간이 있고 거기에 비둘기들의 둥지가 있었다. 비둘기의 배설물이 그득히 쌓여 있는 그 중간에 하얗고 조그만 알 넷이 놓여 있어 비둘기들을 당장 내어 쫓을 수가 없었다. 하필 왜 이곳에 비둘기들이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을까 의문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종복이네 가게 간판 뒤에는 비둘기들이 쉴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고 그 위로는 간판을 가리는 돌출된 벽면이 있어 독수리 같은 천적이나 뜨거운 텍사스의 햇빛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은신처였다. 사정이 이러니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냥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사십여 일이 지나 종복이네 가게를 다시 찾았다. 이쯤이면 알에서 부화된 새끼들도 어느 정도 자라 다른 안전한 곳으로 보낼 수 있겠다 싶었다. 간판 위로 올라갈 준비를 하는 동안 잠시 짬을 내어 요즘 경기가 안 좋은데 가게 형편이 어쩐지 그에게 물어 보았다. 애써 괜찮다고 하지만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어두운 그늘이 얼굴에 드리웠다. 괜히 물었다 싶어 조금 무거워진 마음으로 사다리를 놓고 간판 위로 올라가니 놀란 비둘기들이 후다닥 날아가고 제법 솜털을 벗은 새끼들도 그 뒤를 따라 부랴부랴 도망쳤다. 나는 긴 호스를 끌고 올라가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배설물을 물로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내 기분이 풀릴 때까지 물질을 계속하다 한 시간이 훨씬 지나버렸다. 옷과 신발이 다 젖어 어쩔 수 없이 내려와야 했다. 식당 입구 바닥에 쏟아져 내려 수북이 쌓인 비둘기들의 배설물까지 쓸어 담느라 또 한 시간이 지나서야 일을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비둘기가 다시는 둥지를 틀 수 없게 해야 했다. 잠시 쉬다 다시 간판 위로 올라가 못처럼 매우 뾰족한 플라스틱 장치를 비둘기가 살던 그 공간에 빈틈없이 촘촘히 붙여 놓았다. 비둘기의 가는 다리라도 비집고 디딜 틈조차 없어 보였다. 그 뾰족한 침들을 보면서 비둘기들에게 미안해서 괜한 혼잣말을 했다. “얘들아, 이제 여긴 위험해. 제발 저쪽 언덕 위 숲속으로 가서 살아라. 그래야 너도 살고 종복이도 산다.”

 

그 일 후 며칠 동안 정신없이 일하느라 시간 가는지 모르고 지냈다. 그러다 잠시 한가해지자 그 짧은 틈을 파고드는 것이 있었다. 섬광처럼 훅 스쳐가는 그 무언가를 잡아보려고 애를 써 보았다. “이게 뭐지?” 잠간 시간이 멈추고 툭 튀어나오는 뭔가 있었다. “아! 생명이 있는 것들이 자기 삶의 터전을 쉽게 포기한 것을 이제껏 한번도 못 보았어.” 얼른 종복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즘도 비둘기들이 오니?” 돌아온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예전처럼 많지는 않은데 서너 마리가 간판 위에 매일 와 앉아 있어요. 참 끈질기네요.”  

 

동물들의 생명력이 얼마나 신비하고 끈질긴지 항상 내 예측을 뛰어 넘어 나를 놀라게 해왔다. 일 년 내내 기온이 높이 오르는 댈러스도 겨울은 꽤나 춥다. 이때면 쥐나 청설모 같은 설치류들이 사람들이 사는 공간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11월이면 이곳저곳에서 도와달라는 손님들의 요청이 쏟아진다. 손님들은 왜 하필 자기 집이냐고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건물만 꽉 찬 이 도시에서 야생 동물들이 이 추운 겨울에 어디에서 살란 말인가. 야생 동물이 집 안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은 덫도 놓고 약도 뿌려 잡거나 몰아내려 한다. 그러나 설치류들도 이런 위험을 겪으며 생존 능력을 수천 년간 키워와 여간해선 당하지 않는다. 덫도 피해가고 독극물을 여간해선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럼 단 한 가지 방법만 남는다. 설치류들이 뚫어 놓은 구멍들을 철판으로 단단히 막아버려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게 해야 한다. 이때부터 사람과 동물의 본격적인 생존 투쟁이 시작된다. 갈 곳이 없는 설치류들이 이 안락한 공간을 포기할 리 없다. 이 설치류들이 뚫고 들어간 구멍을 다 막으면 새로운 곳을 뚫기 시작한다. 구멍 열 개를 막으면 열한 개째를 뚫어 악착같이 들어와 산다. “난 추운 겨울에 잘 곳이 없다고. 왜 자꾸 못 들어오게 하는데” 하는 그들의 절규가 절절히 느껴진다. 구멍을 막다가 청설모와 여러 번 마주친 적이 있다. 멀리 떨어져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쳐다보면 원망에 찬 눈으로 나를 째려본다. “막아 봐라. 또 뚫는다” 이런 느낌이다. 결국 나는 한 곳에서 그들이 뚫어 놓은 구멍을 열 개 넘게 막아본 적이 여러 번 있다. 이러다 겨울이 다 지나가고 봄이 오면 그들은 사람들의 집을 나가 따듯한 숲을 찾는다. 그러다 그해 겨울이 오면 예상한 일이 또 생긴다. “또 지붕에서 동물 소리가 나요.” 해가 바뀌어 그 녀석들이 또 찾아온 것이다.

 

비둘기는 이런 설치류보다 더 질긴 생명력을 보인다. 설치류들과 다르게 비둘기들은 수천 년간 사람과 친밀하게 관계를 맺어왔다. 중세 무슬림들이 통신용으로 쓰기도 하고 20세기 초에는 유럽의 가난한 사람들이 애완용으로 길렀다. 그 이후 사람들이 개나 고양이를 선호하고 세계 대전 이후 비둘기들의 통신 수단 사용도 필요 없게 되었는데, 이제는 비둘기들이 각종 수인성 전염병의 매개체가 되어 사람들이 멀리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국은 올해 12월 20일부터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것을 금지한다고 공지했고, 샌프란시스코 같은 미국의 도시들도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면 수백 불에 해당하는 벌금을 부과한다고 한다. 상황이 이런데 버려진 비둘기들은 완전 야생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람들의 주위를 맴돌며 반 야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비둘기들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 의지해 살아간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 손에 길들여진 그들이 독립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들이 많은 도심, 외곽 공원, 식당가에서 사람들이 버린 음식을 주워 먹고 사람들이 세운 빌딩의 은신처를 찾아 무리지어 살아간다. 마치 강아지를 더 키울 수 없게 된 사람이 먼 곳으로 가 강아지를 버리고 차를 타고 떠나자 그 강아지가 죽기 살기로 주인의 차를 따라 달리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 강아지는 그 후로 지나가는 차만 보면 혹시 하며 차를 뒤쫓아 따라간다. 비둘기들은 수백 수천 년을 이렇게 사람들의 애정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서 다시 종복이네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사다리를 놓고 다시 간판 위로 올라가 보았다. 올라가면서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게 뾰족한 스파이크를 빈틈도 없이 설치했는데… 앉으면 찔리는데 왜 못 떠날까. 사다리 끝에 올라 온 거리를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비둘기들이 옮겨갈 곳을 찾겠다고 그 거리를 한참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차 싶었다. 종복이네 가게처럼 간판 뒤 넓은 공간과 비와 햇빛뿐 아니라 천적의 눈에 띄지 않게 가려주는 구조물이 시내 어디 한 곳에도 없었다. 길 고양이들이 왜 한 사람을 선택해 자꾸 귀찮게 찾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왜 하필 이곳이니 하던 원망이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미안해’ 하는 생각으로 돌아섰다.

 

사다리 위에서 숨을 돌린 후 고개를 돌려 비둘기들이 자주 앉아 있다는 곳을 유심히 보았다. 순간 생명에 대한 외경과 찬탄, 희생, 고통, 희망 등 온갖 감정들이 나를 사로잡아 온 신경이 곤두서게 만들었다. 그 비둘기들이 앉아 있던 곳에는 너른 나뭇잎들이 날카로운 침 위에 여러 장 깔려 있고 그 위에 여러 개의 알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아찔했다. 밀려오는 현기증에 사다리에 몸을 기대어 한참을 호흡을 달래고 있는데 한 장의 그림이 내 앞을 가로막고 어른거렸다. 아득하니 시간이 멈추어 버렸다.

 

먼 옛날, 가난한 사람들의 손에 들려 번제로 드려진 비둘기들…. 그 작은 몸이 둘로 쪼개지고 태워져 인간 대신 죽어야 했던 그 생생한 현장이다. 자기를 대신해 태워지는 비둘기의 죽음을 보며 사람들이 미안해 얼마나 울었을까. 비둘기들이 죽을 때 마치 자기 뼈가 부러지고 살이 타 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렇게 천여 년이 흘러 자기들처럼 힘없고 가난한 예수라는 청년이 죄 없이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얼마나 사람들이 자기 죄 의식과, 통한, 회심, 안심과 감사를 느꼈을까. 비둘기에서 예수까지 한 그림으로 펼쳐졌다. 그리고 그 그림이 걷히고 앞에 펼쳐진 도시의 풍경들은 비둘기와 인간이 서로 사이좋게 살아갈 새로운 나라로 보였다. 이게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일까?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에 쥐와 인간들이 서로 치즈를 찾는 이야기가 나온다. 쥐들은 치즈의 공급이 줄어 치즈가 없다는 것을 알고 치즈 찾기를 계속 하지만 인간인 햄은 당연히 있어야 할 치즈가 사라졌다고 화를 내며 다른 인간과 다투고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원망만 하고 치즈 찾기를 거절한다.

 

비둘기들은 식당 앞에 떨어진 먹이를 계속 찾아다니고 종복이는 장사도 안되는데 왜 비둘기까지 힘들게 하는지 원망할 수밖에 없고 나는 종복이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사다리 위에 올라가 본 새 세상의 그림이 나를 이끌었다.

 

사막에 백합이 피며 이리가 어린양과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누우며 … 젖 먹는 어린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이사야 11:6-9). 이사야 선지자는 훗날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보여 줄 그 나라를 미리 그려 보았다. 인간의 탐욕은 더 큰 집, 더 높고 넓은 빌딩을 원해 동물들의 공간을 빼앗아 왔다. 더 편리한 세상을 원해 도시화, 산업화 하며 기후 문제를 일으켜 동물들의 숲을 파괴해 왔다. 터전을 빼앗긴 야생 동물들이 사람들의 거주지를 습격하여 인명 피해를 일으키는 일도 잦아졌다. 

 

동물에 대한 동정심은 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치스런 감정에 불과하다. 사람들의 거주지에 들어온 동물, 벌레들을 잘 처리해야 생계에 지장이 없는데 동물 애호가 같은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면 이 직업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런데 내 직업에 앞서 난 어쩔 수 없는 그리스도인이다. 작은 동물, 벌레 하나를 보아도 창조주의 손길이 느껴지고 때로는 그 미물의 삶에 대한 공감, 어쩔 수 없는 상상력이 펼쳐져 내 눈앞에 스토리가 생겨나는데 어쩌란 말이냐. 다른 생물들의 고통스런 형편과 처지가 눈에 들어오고 그들을 향한 주의 뜻이 믿어지는데 어쩌란 말인가. 내가 건 간판을 벗겨내고 그 뒤에 숨겨진 타인과 타 생명체의 삶에 공감할 때 보이는 그림들은 신앙이 아니고는 설명이 불가하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그림은 주가 보여주신 희생이 아니고는 그려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