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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제목 | 하나님의 ‘래빗 홀’ | ||
| 분류 | 그리스도인의 삶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4-0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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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래빗 홀’
by 박혜영 2024-09-05
시간을 되돌린다면 더 잘할 수 있을까요? 컴퓨터의 문서작성 편집 기능에는 이미 지운 문장들을 되살리는 ‘되돌리기’ 기능이 있습니다. 이미 지운 문장인데도 실행하면 복구됩니다. 인생에도 이런 기능이 있다면 좋을까요? 10년 전을 불러오고, 20년 전을 불러와서 삭제하거나 수정할 수만 있다면…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어떤 과거를 수정하고 싶습니까?
미국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1963년 11월 22일로 돌아가 존 에프 케네디의 암살을 막고 싶다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적어도 한 명은 분명하지요. 스티븐 킹, ‘공포 소설의 제왕’이라고 알려진 작가 말입니다. 이 사람이 어느 정도인지는 영화 <쇼생크 탈출>이 그의 소설이라는 점만 말하면 될 거 같습니다. 이 사람의 소설 <11/22/63>을 읽었습니다. 존 에프 케네디의 암살을 다룬 소설이라는 말에 단번에 낚였습니다. 아직도 그 사건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JFK>라는 영화도 있지 않았습니까? 스티븐 킹이 사건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 보고 싶었는데, 시간 여행이었습니다.
소설에 나온 주인공은 2011년 사람인데, 병들어 점점 쇠약해가는 친구에게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토끼 굴(래빗 홀)’을 알게 됩니다. 여기로 굴러 떨어지면 언제나 1958년 9월 9일 오전 11시 58분으로 돌아갑니다. 주인공의 친구는 그때로 돌아가 존 에프 케네디의 암살을 막아야 하지 않겠냐고 설득합니다. 자신의 몸 상태로는 1958년으로 돌아가 5년 동안 기다렸다가 그 암살 사건을 막아 낼 힘이 없다고 하면서, 그 시대를 사는 데 필요한 요령과 암살을 막는 데 필요한 자료를 다 넘겨줍니다. 주인공은 처음에는 시험 삼아 한 번 들어갔다가 돌아오고, 두 번째는 가까이 지내는 어떤 사람에게 닥친 불행한 사건을 직접 막기 위해 들어갔다가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알게 되는 데, “과거는 고집이 세다”(1권 280)는 점입니다. 소설은 이 말을 계속 반복합니다. 과거는 쉽게 바뀌려 하지 않으며, 주인공은 이런저런 어려움을 당합니다. 친구는 “과거가 변화에 저항하는 강도는 어떤 행위에 따라 미래가 얼마나 달라지는가에 따라 정비례 한다”(1권 386)고 가르쳐 줍니다. 게다가 이 ‘래빗 홀’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는 하지만, 현재로 돌아왔을 때 그 수정한 과거로 인해 상황이 좋아질지 아니면 나쁘게 될지 그건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말 절박한 일, 정말 큰 영향을 끼친 일이 아니라면 시간여행을 함부로 할 순 없었습니다. 주인공이 볼 때, 그래도 존 에프 케네디의 암살은 막을 수만 있다면 막고 싶은 비극이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시간 여행을 떠납니다. 결말이 무엇인지 제가 다 말해 버리면, 읽어 볼 분들에게 방해가 될 테니 그러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주인공은 마지막에 한 번 더 1958년 9월 9일로 시간 여행을 떠나는 데, 그때는 아무것도 수정하지 않고 편지 한 장만 쓰고 돌아온다는 점만 알려드립니다.
읽으면서 내내 생각 난 성경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9).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실수나 비극이 안타까워 ‘시간 여행’이라는 상상을 합니다. 만약 그때 그 버스를 타지 않았다면, 만약 그때 거기에 가지 않았다면, 만약 그때… 그러나 우리에게는 ‘래빗 홀’이 없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미래로 흘러가지 되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설령 되돌린다고 해도 크게 다른 생활을 할 거 같지도 않고요. 그런데 바울 사도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지난 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삶이 있다는 겁니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에는 과거의 일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요? 만약 ‘앞으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했다면, 과거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과거의 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다면, 이건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섭리의 영역이 시간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래빗 홀’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 수정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이 우리의 삶에 들어오는 ‘래빗 홀’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믿음이 정녕 이런 믿음입니까? 후회스러운 과거, 원망에 가득 찬 과거조차도 합력하여 선이 되는 그런 ‘래빗 홀’이 있다니! 정말 상상을 초월하지 않습니까? 스티븐 킹이 바울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다니, 아, 이 사람을 또 읽어야 하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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