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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제목 한 점의 그림이 설교보다 더 강렬할 때도 있다
분류 예술과 문화
작성자 전체관리자 작성일 2024-08-31
첨부파일
한 점의 그림이 설교보다 더 강렬할 때도 있다
by 최창국 2024-08-29

많은 교회 공동체가 묵상과 기도를 위해 예술 작품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마르틴 루터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상과 같은 종교적 형상들을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기념물이나 이미지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루터에 따르면, 형상은 “계시에 관한 이유와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마음을 위한 성상으로써 교훈적 선포를 한다”(John Cook, “Picturing Theology: Martin Luther and Lucas Cranach,” 39에서 인용). 루터와 같은 견해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비기독교 문화가 많은 가치를 생산해 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관점에서 진리의 보편적 이용 가능성을 말하는 이러한 논증은 “누가 어디서 한 말이건 간에 좋은 말은 모두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속한다”고 강조한 순교자 저스틴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Justin Martyr, The Second Apology, 13). 다시 말하면,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어디서 나타나건 환영 받아야 한다. 

 

교회가 예술 작품에 단지 ‘윤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그 작품의 가치와 형성적 힘을 파괴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술 작품을 단지 윤리적 접근이 아니라 심미적으로 볼 줄 아는 자질도 길러야 한다. 본질적으로 진선미는 하나님께 속한다. 따라서 아름다움과 신적인 것 사이에는 본질적인 관계가 있다. 기독교 초기 신학자들은,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다른 이름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아름다움과 아름다운 것의 관계를 구분했다. 아름다움이 하나님의 다른 이름인 반면, 아름다운 것은 신적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경험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경험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영적인 기초가 있다.

 

칼뱅은 작가의 아름다운 작품을 볼 때마다 그 작품 속에 빛나고 있는 놀라운 빛을 통하여, 비록 타락하였으나 인간은 아직도 하나님의 뛰어나신 은사로 옷 입혀져 있고 장식되어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하였다(John Calvin,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II, ii, 15). 교회는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삶의 역동적 차원들에 대한 연구와 실천의 영역인 예술,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자료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언급했듯이,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해석의 문서들, 즉 예술,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은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저작의 원문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한 인간의 시도들이기 때문이다(Abraham Kuyper, “Common Grace in Science,” 444).  

 

성경의 이야기와 인물들을 그림으로 그린 성화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성화는 단지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아주 단순한 해석이다. 성경의 이야기와 인물들을 성화와 성상으로 표현한 것은 단지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선과 색으로 하는 심미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성화와 성상은 성경의 이야기와 인물들을 선과 색과 모습으로 한 예술적 표현이며, 심미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서방 교회의 영성 생활에 지대한 공헌을 한 베네딕트는 ‘마음의 귀’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청각적 차원을 중요하게 가르쳤지만, 동방교회에서는 사도 바울이 말한 ‘마음의 눈’(엡 1:8)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는 시각적 차원을 중요하게 여겼다. 교회 전통에서 성화와 성상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그리고 풍성하게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아가 성경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본문이지만, 성화와 성상과 같은 예술 작품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성화와 성상은 심미적으로 해석된 본문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글로 기록된 된 성경뿐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 작품도 성령의 은총과 관계된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신이 충만케 된 사람으로 처음 언급된 사람은 브살렐이다. 그는 지혜와 총명과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공교한 일을 연구하며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여러 가지 공교한 일을” 하였다. 특히 브살렐이 주어진 재능을 가지고 예술 작품을 만든 것을 성령 충만의 형태로 인식되고 있다(출 35:31-33). 칼뱅은 브살렐의 예술적 솜씨를 성령의 일반은총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칼뱅은 성령의 일반은총으로서 예술적 솜씨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성화의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John Calvin,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II. ii. 16). 교회는 성화와 성상도 성령의 일반은총의 선물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칼뱅은 또한 건전한 종교적 예술 작품이 가진 영적 가치도 인정했다. 그는 “조각과 그림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덕을 위해 이들을 사용 하신다”고 했다(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 xi. 2). 예술 작품은 자신과 세상을 보는 안경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성화와 성상과 같은 예술 작품의 시각적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 하나님과 보다 더 풍성하게 대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상태나 하나님의 손길을 다루는 예술 작품을 묵상할 때, 우리는 보다 더 깊은 영적 의미들을 묵상해 낼 수 있다. 게다가 문자로 된 성경 이야기를 읽는 것보다 한 편의 그림으로 표현된 성경 이야기가 더 강력할 수 있다.  

 

헨리 나우웬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박물관에 있는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1666)을 통해 깊은 영감을 받고 책을 저술했다. 그 그림에는 탕자가 무릎을 꿇고 회개의 눈빛으로 아버지의 품을 바라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아들은 누더기가 된 옷과 찢어진 신발을 신고 있고, 아버지는 자신의 적색 겉옷을 아들에게 감싸주고 있다. 거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고통과 절망 중에 있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광경을 불만으로 가득 찬 눈길로 바라보는 형의 모습이 그 아버지의 뒤 쪽에 위치하고 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향해 구부정하게 몸을 기울이며 쫙 편 그의 두 손을 탕자의 어깨에 올려놓고 있다. 우리도 그 그림을 통해 조건 없이 우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넓은 사랑과 위로를 경험할 수 있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우웬은 문자로 쓰인 탕자의 이야기를 많이 읽었지만, 렘브란트의 이 그림을 보며 묵상할 때, 그 비유의 진리가 그의 가슴 속에 새로운 열정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나는 두 인물 간의 친근감, 푸근한 느낌을 주는 아버지의 붉은 옷, 아들의 누런 옷, 둘을 감싸고 있는 신비로운 빛에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묻혀 있던 내 내면의 한 지점을 건드린 것은 무엇보다도 아들의 어께를 감싸고 있는 늙은 아버지의 손이었다”고 고백했다(Henri M. Nouwen,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4). 그 그림은 그에게 하늘의 영광을 떠나 죽음의 괴로운 자리로 내려오신 그리스도와 이후 부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다시 기쁘게 상봉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그가 그 그림을 묵상함으로 얻은 감동은 그 동안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받는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되찾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그 그림에 있는 탕자뿐 아니라 자기 의에 취해 불만이 가득했던 형의 모습에서도 자신의 일면을 발견하고 긍휼하신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를 치유하고 회복하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자기 아버지와 관계가 회복되는 계기도 되었다. 그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통해 설교를 통한 말씀처럼 자신에게 도전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했다. 

 

우리는 기도의 실천에서 단지 음성 언어만이 아니라 그림이나 형상도 중요한 기도의 언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예술 작품 만들기를 통해 기도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성경의 한 본문을 읽고 묵상한 후에 바로 음성으로 기도하기보다는 묵상한 것을 토대로 그림을 그리거나 형상 만들기를 통해서도 기도할 수 있다. 성경 묵상을 통해 깨달은 내용을 가지고 상상력을 동원해 하나님 앞에서 예술 작품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단지 음성으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매개로 삼아 창조적인 활동을 통해서도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음성의 언어만이 아니라 예술적 언어를 통해서도 할 수 있다. 우리는 다양한 형상을 통해 더 풍성하고 역동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