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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제목 | 소설은 읽을 시간이 없다는 당신에게 | ||
| 분류 | 그리스도인의 삶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4-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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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읽을 시간이 없다는 당신에게
by 서나영 2024-09-25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곳곳에서 들리는 반가운 소식은 그리스도인들이 우후죽순 모여 독서모임을 만들고 책을 읽는 것이 트렌드가 되었다는 것이다. 에큐메니컬, 글로벌 스탠다드, 총체적 선교, 통합과 투쟁의 한국 교회의 풍경, 그 거창한 큰 흐름 속 미세한 물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진리에 목말라 평균 두세 개의 독서모임에서 함께 책을 읽고 있는 청년들과 학자들을 만난다.
오늘날 책에 대한 기독교 문화의 주류는 사상이다. 사상이란 ‘구체적인 사고나 생각’ 또는 ‘판단과 추리를 거친 의식적 내용 또는 논리적 타당성을 갖춘 통일된 판단 체계’를 말한다. 나는 기독교가 믿는 사상, 즉 성경적, 신학적, 교리적 관점을 설명하는 책 아닌 다른 장르의 책을 읽는 모임을 거의 만날 수 없었다. 시를 만들고 읽는 기독교 모임은 간혹 있지만, 특히 소설을 읽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마치 필요한 단백질을 공급받기 위해 닭가슴살만 먹는 다이어터들처럼, 가던 길로만 다니며 새로운 공간에 대한 욕구가 사라진 사람처럼, 또는 마음에 드는 성경구절만 묵상하며 새로운 삶으로의 확장을 거부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오늘의 기독교 문화는 사상만이 진리를 나른다는 확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목사들은 신학교에서 주석서, 신학서, 세계관 저서, 역사서를 중심으로 배웠고, 설교 또한 그들의 축적된 연구에서 나오기 때문에 교회도 기독교 사상 이론을 읽히고 설명하기에 바쁘다. 크신 하나님의 능력과 범위를 축소하는 것이 작은 문제가 아니듯, 진리의 영역을 사상적 가르침의 영역으로 제한하는 것도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 왜냐하면 삶에 대한 진실은, 불행히도, 문학의 영역에서 주로 다루기 때문이다. 우연히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마주하고 응시한 멋진 그림 한 점이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부주의를 정상처럼 여겼는지’ 깨닫게 해 주듯이, 좋은 소설 한 편은 기존의 나를 넘어서는 인간의 경험을 보게 한다.
엊그제 철학과 교수들 독서 모임에 잠시 들을 일이 있었고, 그들은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를 읽고 있었다. 서로 읽고 있는 책들을 공유하고 추천 받는 자리에서 초면 첫 대화에 한 박사님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녀는 내가 읽고 있는 모든 책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유는 (1) ‘publication’의 프랑스어 어원을 설명하며 ‘대중의 입맛에 맞추어진 거의 모든 저서들은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 (2) ‘진귀한 철학 이론서를 다 읽기에도 인생은 짧고 시간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문학작품을 왜 읽어야 하는지’ 변증하기에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 단호해서 마음의 숙제로 가져왔다.
따라서 이 에세이의 작지만 확고한 목적은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에 대한 짧은 기독교 변증을 통해 ‘색다른 통로를 통해서도 유익을 얻고 성장할 수 있다’는 진실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잠을 자지 않는 순간에도 꿈을 꾸고 싶은 이들, 상상을 통한 통찰력을 원하는 이들, 진정한 말씀 묵상을 경험하고 깊이를 더하고 싶은 이들, 삶의 진리를 자세하게 관찰하고 싶은 이들, 여가시간을 최고의 매체로 채우고 싶은 이들, 삶의 모든 고단함과 외로움을 가장 아름다운 대서사 속에 끼워 넣고 싶은 이들, 모두에게 말이다.
1. 메시지와 삶의 연결
밀레니엄 세대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늘 느끼는 갈급함은, 절대적 빈곤과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로의 한계다. 아예 인지할 수 없다면 모를까, 그 모든 것을 경험한 세대와 함께 자라고 그들의 삶을 보고 자랐다는 것이 문제다. 예를 들면, 어릴 적 당시 이십대를 살고 있는 청년어른들은 ‘산기도’의 영성으로 다져진 세대였다. 산 속 좋은 기도자리를 찾는 경쟁도 매우 치열했고, 나무 하나를 잡고 밤을 새워 부르짖던 모습과 소리가 아련히 기억난다. 나의 세대 젊은 목사들과 리더들은 (나를 포함해, 여러 가지 위험 요소를 걱정하고 몸을 사리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인지) 산기도를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또 다른 예로 전쟁을 겪은 부모와 8형제 밑에서 자란 아빠의 번개 같은 식사 속도를 나는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작은 풋사과 한 알이라도 생기면 각자 비밀 보관소에 숨기기 바빴던 8형제의 스토리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지만, 동시에 공감할 수는 없다. 성경 속 모세를 따라 나선 이스라엘 백성의 반찬 투정이 무서운 폭동과 항쟁이 일어나기까지, 그들의 빈곤과 가난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성경을 얼마나 자세히 이해할 수 있을까? 물이 부족하지 않은 나라에서 태어나 목말라 본 적이 없는 내가 ‘목마른 사슴’의 갈급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한국에서 여자로 태어나 군사로서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는데, 바울의 군대 병사의 비유는 평생 제대로 깨달을 수 있을까? 짧은 평생에 걸친 나의 질문들이었다.
이런 태생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넓혀주는 것은 소설이라는 장르였다. 특히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5년 주기로 꺼내 보는 최고의 소설이다. 현대의 고도로 발전된 도시가 주는 문화의 편리한 구조 속에 다른 상상을 하지 못하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이 되어 있다면 주기적으로 읽기를 추천한다.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며 동시에 세상이 쫓는 가치를 따라 사는 ‘세련된 신앙인’이 되겠다는 사람들, 믿음의 고백으로 천국행 승차권을 예약해 놓은 채 현재 삶 속 인기와 화려함과 명예를 위해서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사람들, 그래서 불신자로 하여금 성공의 본을 보여 그들을 복음의 길로 인도하겠다는 합리적 사람들에게 특히 추천한다. 환난의 시대 종교적 전쟁을 겪으며, 장애를 가진 딸아이 때문에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옥에 오랫동안 수감되었던 번연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어떤 길인지, 자세히 반복해서 체험해보기 바란다. 그가 보여주는 진리의 메시지가 그의 비유형식의 글을 통해 당신의 삶을 파고들 테니 말이다.
소설가의 두드러진 특징은 삶에 대한 탁월한 관찰이다. 번연이 소설을 통해 ‘죄의 자각이 어떤 것인지’ 자신의 경험을 관찰하고 전달하는 방법은 가히 압도적이다. 훌륭한 글의 조건은 글과 같이 살았던 사람의 삶이 그대로 글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번연은 설교를 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면 3개월이면 풀려날 수도 있었지만 타협하지 않음으로 12년이나 감금되었으며, 마지막 6년 동안 이 소설을 썼다. 그의 순전했던 삶과 투철한 청교도 영성이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된 이 소설은, 기독교의 순전함이 아름다움과 매력과 환희를 멀리하거나 적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삶으로 반증해 준다. 그의 소설은 그의 실제 삶을 허구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풀어 당신의 삶과 연결해 줄 것이다.
2. 내면의 성찰과 씨름을 통한 성장
소설은 인간의 삶과 감정과 경험에 관한 것을 다룬다. 기독교 사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서는 불행히도 이러한 경험을 주지 못한다. 오늘날 기독교 문화는, 현실을 최소한으로 줄여 놓고 버티면서 많은 종교적 행위와 공상으로 풍선처럼 부풀려 채운 다음 그것에 “기독교적”이라는 태그를 붙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잊고 있는 중요한 진리가 있다. 중세 수도원 시절부터 오늘까지 ‘기독교적 삶’의 정의에 대한 수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유일하게 일치하는 진리는 ‘고독, 침묵, 금식’이 내면의 영성에 기초가 된다는 사실이다. 즉, 덜 바쁘고 덜 분주할수록 기독교적으로 살 수 있는 범위가 커진다는 뜻이다.
지금 삶이 분주하다면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프랑스 소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를 읽으며 함께 씨름해 볼 것을 추천한다. 첫 페이지에 이름 모를 시골 신부가 “어느 본당에서나 선과 악은 무게중심을 아주 아래쪽에 둔 채 힘의 평형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일기 형식의 소설을 통해, 함께 포개져 있는 선과 악의 경계선에서 투철하게 고민하고 사랑하고 헌신하고 성장했던 작가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권태와 세속에 물드는 것’에 대한 사유, 굴욕과 무시 속의 헌신, 아픔과 가난과 절망과의 싸움, 종교지도자들과 부유한 영주들의 타락을 대하는 자세, 그 중심에서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키는 방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헌신하려는 전쟁 같은 마음, 처절한 외로움 속 죽음의 순간에도 “모든 것은 은총”이라고 고백하기까지의 진리.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의 내면에 꼭 필요한 내면의 성찰과 씨름의 과정을 그와 함께 경험할 수 있다.
좋은 소설의 특징은 힘겨운 내면의 성찰로 초대한다는 것에 있다. 고(故) 이어령 박사는 자기 자신의 추함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며, 이 일은 미친 사람만이 좋아한다고 표현했다. 오직 예술가들만 추한 것을 자세히 관찰하고자 하는 호기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관점으로, 어쩌면 소설가는 최고의 예술가다. 본성이 죄로 가득 찬 우리의 내면세계를 보게 하기 때문이다. 조용히 집중해서 내면에 집중하고 하나님의 법과 투철하게 씨름해 본 적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이 만나야 하는 사람은 심리상담가가 아니라 좋은 소설가일 수 있다. 복잡하고 힘든 내면의 공사 과정을 쉽게 거쳐 가고 생략하도록 돕기 위해, 편리한 신학 이론 설명과 성경 공부 프로그램들에 집중하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우리 내면의 진리의 성찰을 도와줄 소설가와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3. 더 깊은 말씀의 묵상 속으로
청년들과 책을 함께 읽어본 결과, 기독교 사상을 설명하는 책들 보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같은 소설 속에서 삶을 더 뜨겁게 더 많이 투영했다. 그들은 성경을 매일 읽지만 “의무적으로” 읽을 때가 많다고 했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파헤치는 것에 열정적이지 않을까? 많은 복합적 이유가 있겠지만 더 쉽게 더 많이 성경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교회에서 했던 교육과 노력들이, 성경을 하나의 신비한 절대 경전으로, 어렵고 파헤쳐야 하는 비밀 지도로 인식하도록 인도한 것만 같았다.
사실은 그 어떤 재미있는 소설보다 성경이 더 문학적이다. 성경은 재미있고 매력적이며 아름다운 문체들로 가득하다. 예수님은 소설의 형식과 같이 허구의 비유형식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고, 예언자들은 판타지 요소가 가득한 언어로 진리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만약 성경을 이미 많이 읽었고, 읽을수록 재미가 없어지고, 다 아는 내용 같고, 매너리즘에 빠졌다면, 성경의 문학적 요소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했을 확률이 크다. (물론 이에도 성령님의 조명하심과 도우심이 가장 중요하다)
영웅의 이야기, 비극, 서사시, 비유, 상징, 이미지, 속담, 사랑에 관한 시, 찬송가, 예언시, 풍자, 행위예술 등을 담고 있는 성경 66권은 그 자체로 문학예술이다. 분별력을 갖춰 종교성에 속고 살고 싶지 않다면 예언자와 친해져야 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지만 차오르는 분노와 설움이 한계에 다다라 쏟아 놓을 곳이 필요할 때는 다윗의 시들을 옆에 두어야 한다. 단순하고 명확한 결단이 필요하다면 솔로몬의 잠언을 새기고, 갈 곳 몰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갈급하다면 사도 바울의 글들과 동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짧은 생애 동안 읽어야 할 중요한 너무 많은 신앙 저서가 많기 때문에 문학 작품은 성경에서만 읽고 즐겨야 할까? 한정된 여가시간 동안 성경을 읽을 시간도 부족하다면 굳이 소설읽기라는 여가시간이 필요할까? 아니면 기독교 관점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시나 문학작품만을 가끔 외식하듯 읽어야 할까? 많은 질문들을 할 수 있다. 번연은 그의 소설의 서문에서 그의 글을 변증하며 말했다. “진주 한 알이 두꺼비 머릿속에 들어 있을 수도 있고, 굴 껍질 속에서 발견될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보장은 없지만 금보다 더 좋은 것이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생각만 가지고 그걸 찾아내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을 누가 함부로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역사적으로 인정되고 온 세상이 주목하는 소설이나 문학 작품에 눈과 귀를 닫는 것이 기독교적인 태도일까? 내가 경험한 바로는 온 세상을 웃게 하고 울린 소설에는 보편적 진리와 은총이 존재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최근의 개인적 체험은, 소설을 통해 상상력이 키워진 청년들이 성경을 다시 재미있게 파헤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언어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의 회복은 매우 중요하다. 기독교는 일차적으로 성경의 언어로 설명되기 때문이며 체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귀한 만큼 소설을 선정함에 있어 지혜로워야 한다. 한 가지 제안은 저명한 신학자이자 기독교 문학자인 사람들의 추천작을 먼저 시도해보는 것이다. C. S. 루이스나 유진 피터슨, 그리고 문학 신학자 리랜드 라이켄의 추천작 중 선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라이켄은 그리스도인의 구체적 소설 입문에 대해, 일주일에 세 시간 정도를 할애해서 읽어보라고 제안했다.
분주함과 속에서 정신이 없다고 느낄 때 소설을 펼쳐 보기를 바란다. 그 잠깐의 여행은 또 다른 진리를 선물할 것이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때에도 좋은 소설을 펼쳐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의 고단함이 주님이 계획하신 아름다운 대서사 속 한 에피소드일 뿐임을 경험하게 해 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모든 시간적 우선순위를 드리고 헌신하기를 결단한 열정의 리더도 때로 좋은 소설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오히려 내면의 부흥을 경험하고 당신 내면의 최상의 욕구가 주 앞에 침묵하며 기도하는 것으로 전환될 수 있도록 말이다. 기독교 문화 속 하나님의 거룩한 언어의 능력이 충만하게 임하길 소망하며, Soli Deo Glo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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