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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제목 | 교리 설교의 모든 것 | ||
| 분류 | 서평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4-0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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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설교는 교회의 사명이다예수님도 교리를 설교하셨을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성경을 설교하는 것과 교리를 설교하는 것을 다르게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도들이 사용한 ‘교훈’ 또는 ‘가르침’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didaskalia는 ‘교리’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은 세례 명령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가르쳐야 하는 내용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 즉 그분이 계시하신 하나님의 본질과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신 기독론적 교리를 포괄한다. 단지 예수님의 윤리적 교훈과 삶으로 국한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과 교회는 거짓된 교훈에 맞서 믿음의 규범(regula fidei)인 교리를 설교했다.
우병훈 교수의 『교리 설교의 모든 것』은 설교단에서 왜 교리가 흘러나와야 하는지를 호소한다. 첫째, 교리 설교는 성경의 핵심 가르침을 풀어내고, 둘째, 교리를 적실하게 적용함으로 신자들의 경건의 유익을 주며, 셋째, 기독교를 이단과 타종교로부터 구분하는 선명한 복음 위에 세우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로이드 존스는 교리에는 관심 없고 위로 설교, 고민을 덜어주는 설교에만 관심 갖는 신자들에게 교리를 알아야 한다고 엄포하기도 했다.
주해에 기반한 교리 설교
설교학자 윌리엄J.칼Ⅲ은 Preaching Christian Doctrine에서 “모든 설교가 참된 기독교적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성경에 뿌리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 역시 가장 좋은 교리 설교를 성경 주해에 근거한 설교임을 재천명한다. 반면 가장 안 좋은 교리 설교는 성경 주해가 없는 설교이다.
오늘날 성경 연구 프로그램이 획기적으로 개발되고, 수준 높은 신학 강좌를 동영상으로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촘촘하게 성경을 파헤칠까? 설교자는 여러 방면의 지식과 폭넓은 독서로 청중과 교류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설교자는 ‘한 책의 사람’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4:13)고 말했다. 이와 반대되는 측면은 다른 교훈과 신화와 족보에 몰두하는 것이다(딤전 1:3-4). ‘전념하다’와 ‘몰두하다’는 둘 다 prosechō를 사용했다. 설교단은 설교자가 전념하고 몰두한 사고가 언어와 몸짓으로 발화되는 곳이다.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리에 천착하는 우선순위가 필요하다(딤전 6:3).
정경적 맥락으로서 교리 설교
교리 설교는 신구약 성경에 통전적으로 접근하는 이로움을 제공한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는 정경의 문맥 즉, “성경과 구속사 전체의 맥락에서 본문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본문 설교(textual preaching)를 본문에 한정된 메시지로만 오해하여 설교한다면 어떻게 될까? 해당 본문에 따라서 어떤 설교는 알레고리나 도덕주의 훈시만 되고 말 것이다.
저자는 기독론과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강조한다. 기독교회는 이미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를 신학과 설교의 중심으로 삼았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그리스도는 교부들에게 있어 진정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원천이었으며, 개혁가들에게는 언약과 삼중직을 성취한 참된 중보자였다.
그렇지만 설교의 정경적 맥락과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는 적잖이 힘든 작업이다. 또한 계시의 점진적 발전과 성취, 이를 이루신 그리스도를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적실하게 적용하는 일은 또 다른 과업을 요구한다. 이에 저자는 두 방향을 제시한다. 하나는 성경을 중심 삼은 기독론적 설교이며, 다른 하나는 교리 교육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중심 설교이다.
교회를 세우는 교리 설교
스콧 깁슨은 『주일 강단을 제자훈련의 기회로 활용하라』에서 제자를 양육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설교는 교리 설교임을 밝힌다. 칼빈의 언급처럼 설교는 기독교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고, 그 목적은 신앙인을 교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2세기 신학자 성 티에리의 윌리엄은 그의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자신의 해석 작업이 교부들과 다른 사람들의 지혜를 빌려 완성된 것임을 겸손하게 비유한 적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작은 새를 여러 새의 깃털로 장식해 왔으므로, 만약 그 새들이 각자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가져가 버린다면, 우리의 작은 까마귀는 벌거벗거나, 심지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설교자의 설교 역시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설교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교리를 창발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회는 단번에 전수해준 믿음의 교리를 붙들고 여기까지 이르렀다. 설교자는 작은 까마귀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앞서 가신 우리의 선배들이 후대를 위해 형영색색의 위대한 깃털을 남겨주었다. 교리 설교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전달받아 계속해서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해야하는 교회의 사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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