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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제목 | 남은 시간 | ||
| 분류 | 그리스도인의 삶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4-1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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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시간
by 양혜원 2024-10-21
시간은 어느 때건 똑같이 흐르건만, 이상하게 가을이 되면 유독 시간이 빨리 간다는 생각을 한다. 물리적으로도 가을이 점점 짧아지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한 해의 끄트머리에 다가왔기 때문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올해는 어머니의 그리고 가까운 선배의 암 소식과 함께 시작되었고, 길게 늘어지던 무더운 여름 끝에는 불과 세 살 위의 직장 상사가 암 판정 후 3개월 만에 사망했다. 이제 내게도 주변에 사망 소식이 점점 많이 들려온다는 그때가 닥친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 상사의 죽음은 좀 때 이르기는 했다. 50대는 하루하루가 죽음에 다가가는 시간이라는 사실이 낯설지 않은 나이이지만, 그렇다고 아직 죽을 나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박사 학위자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정년 트랙의 전임 교수 가운데 중년의 나이에 죽는 교수들의 소식을 드물지 않게 접하는데, 아무리 좋은 직업이라도 거기에는 ‘명’만큼이나 ‘암’도 따른다는 게 정설인 듯하다.
믿기지 않는 죽음이기도 했다. 연구년을 가 있는 동안 수시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일을 하던 사이였다. 하지만, 자신이 죽을병에 걸린 사실을 한번도 내게 말하지 않았다. 그의 질병 소식은 곁에서 가깝게 일하던 다른 동료 교수를 통해서 들었는데, 한 다리 건너서 듣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며 자신이 직접 말하겠다고 했다고 해서 계속 모른 척하며 일을 했다. 그게 그 사람의 뜻을 존중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사실 나에게만이 아니었다. 마지막까지 그의 병세를 제대로 안 것은 가족뿐이었고, 직장에서는 모두가 마른하늘 날벼락처럼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사망 소식을 들어야했다.
곧 연구년을 마치고 돌아와 만날 줄 알았던 사람이 점차 이메일 회신이 뜸해지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현실 같지가 않았다. 너무 현실 같지가 않아서 나는 그가 재가 되어 나오는 현장에까지 따라갔다. 보통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장지까지도 잘 가지 않지만, 나는 동료 교수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화장장까지 가서 그가 떠나는 것을 본 사람이 되었다. 딱 두 달. 그를 얼굴로 보며 알았던 기간이다. 아마도 직장 동료들 중에서는 내가 그를 제일 짧게 알았으리라.
그는 나를 스카우트해 간 사람이었다. 바로 건너편에 있는 연구원에서 연구교수로 일할 때 내게 지금의 자리를 제안했고, 자신이 소장으로 있는 연구소의 특임교수로 데려갔다. 옮겨갈 때 주변에서는 걱정을 좀 했더랬다.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을 소문만 듣고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직접 대면하며 일했던 두 달은 말하자면 허니문 기간이었던 듯, 같이 일할 만하다 싶었다. 그 두 달이 지나고 작년 8월 말에 그는 미국으로 연구년을 떠났고, 우리는 주로 영상 회의나 이메일로 일을 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는 소문대로 같이 일하기 쉬운 사람이 아님이 판명되었다. 역시 아니 땐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인가…
그가 귀국할 시기가 다가오자 어떻게 계속 일하는 관계를 맺어갈지 제법 걱정이 되었다. 일의 양이 생각보다 훨씬 더 과중했던 터라 관계마저 힘들다면 그만둘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비단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치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왕의 귀환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연구소 사람들은 그의 귀국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귀국 시기를 얼마 남기지 않고 암 진단을 받은 그는 일정을 앞당겨 귀국한 후 곧바로 요양원으로 향했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 한번은 얼굴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도 같이 일했던 사람들과 가르쳤던 제자들의 병문안을 한번은 받지 않을까 했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정말 아무도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일까.
만날 날을 기다린 것이 아니면서도 기다려야 했던 그 시간 끝에 결국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끝나버리니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심경이 되었다. 최악의 이별이 상대가 그냥 사라져버리는 잠수 이별이라고 했던가. 매우 짧았던, 직장에서의 만남일 뿐이었던 관계였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관계도 아니었던 이 관계에 어떻게든 물리적인 종지부를 찍어야 마음도 정리가 될 것 같았다.
그리하여 발인하는 날 다시 한 번 장례식장으로 향했고, 운구차에 실리기 위해 나오는 그의 관을 보았을 때 비로소 이 죽음이 현실 같아지기 시작했다. 그 관이 실린 차를 타고 화장장으 가면서는 이 현실을 되뇌었다. 그리고 화장되기 위해 들어가기 직전 마지막 인사를 하라는 말에 그 관에 손을 얹고 잘 가시라고 했다. 그리고서 두 시간 정도 후였을까, 마지막으로 하얀 가루가 되어 나온 그를 보고, 아 이렇게 끝나는 거구나, 했다.
사실 이 모든 과정은 내게 하나의 예행연습 같은 것이기도 했다. 연초에 어머니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을 한번 맞닥뜨렸고, 지금도 중증 등록 환자로서 여명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시간을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상사의 장례를 치르고 열흘 후 우리 형제들은 부모님을 모시고 어머니의 장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묘원을 찾아가게 되었다. 만약 그때 돌아가셨더라면 이런 일도 가능하지 않았겠지만, 시간이 주어졌던 어머니는 직접 자리를 보고 싶어 하셨다. 다행히 좋은 위치에 자리가 있어서 계약을 하기로 했고, 장녀인 내가 계약자가 되어 향후 관리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이 땅을 사용할 사람이 아니라 이 땅을 관리할 사람이 계약자가 된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했다. 묘지의 의미는 관리자가 있어야 비로소 유지된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깨달았다. 매장의 경우, 30년 사용하고 한번 갱신하면 총 60년을 쓸 수 있다는 묘원 측의 설명을 듣는데, 30년 후에 이 계약을 내가 살아서 갱신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이 비현실적인 시간을 놓고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것이 참 어이없게 느껴지며 순간 아들 생각이 났다. 만약 내게 자식이 없었다면…. 대를 잇는다는 것이 이렇게 죽음의 관리까지 의미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기독교 집안이라 제사를 모르고 자랐기에 나 죽으면 누가 내 제사 챙겨주냐 하는 말의 더 깊은 의미가 여기에 있음을 알지 못했다.
작고한 상사는 자녀 없이 이혼한 터라 오빠가 상주가 되었다. 장례 후 친구와 통화를 하며 그 이야기를 했더니, 마찬가지로 자녀 없이 이혼한 친구는, 이런, 우리 오빠에게 잘해야겠군, 그랬다. 천당이라는 곳은 참 막연하건만, 땅에서의 죽음은 이토록 현실적이고 심지어 계산적이다.
계약하고 몇 주 후 묫자리 정비가 다 되었다는 묘원의 연락을 받고 마지막 계산을 하기 위해 기차에 올랐다. 여름의 습한 더위가 남아있던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계약 때는 가족이 다 같이 차로 갔지만, 이 날은 나 혼자였다.
몇십 년 만에 처음 타보는 기차 노선이었다. 용산에서도 탈 수 있고 청량리에서도 탈 수 있었는데, 청량리를 택했다. 도착역에 내려서는 묘원에서 운행하는 셔틀 버스를 탔다. 12인승 승합차 크기였는데, 뒤늦은 성묘객인지 좌석을 꽉 채워서 역을 출발했다. 산 좋고 물 좋은 동네라 묘원 행 버스가 아니라면 나들이 같겠구나 생각하며 차창 밖의 경치를 내다보았다. 우리가 계약한 자리는 제법 높은 지대였는데, 다행히 그 근처까지 셔틀이 가서 쉽게 갈 수 있었다. 자리는 두 구의 시신이 들어갈 수 있게 돌로 테두리를 쳐서 잘 준비되어 있었다. 사진을 찍어두고는 잠시 땀을 식히며 눈앞의 수많은 무덤들을 바라보다가 사무실까지는 걸어서 내려왔다. 그리고 잔금을 치른 후 회원 증서를 받아 들고는 다시 역으로 가는 셔틀 버스에 올랐다. 돌아오는 기차는 완행이었다. 그렇게 긴 하루가 마무리되면서 죽음을 마주하며 보낸 나의 길고도 무더운 여름도 마무리가 되었다.
유난히 땀을 많이 흘린 여름이기도 했다. 평소보다 더 더운 여름이어서도 그랬겠지만, 나의 신체가 변하고 있었다. 실수가 많아지고 여기저기 잘 부딪혔다. 내 몸이 힘들다는 사실이 매우 짜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 뼛가루까지 지켜보고, 두 차례 묘원을 오가며 묘지의 계약자가 된 경험은 내게 좋은 약이 되었다. 일종의 터널비전처럼 목표와 과제 중심으로 살아온 나였다. 시간과 경쟁하며 어떻게든 많은 일을 해내려 했다. 하지만 시간을 이기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숨만 쉬고 있어도 시간은 흐르고, 그 옛날 황진이의 바램처럼 뚝 잘라 광에 넣었다 원할 때 꺼내 쓸 수도 없는 게 시간이다.
가을에는 어째서인지 이런 시간의 특성이 더 잘 와닿는다. 기온이 떨어지면서 무더위에 지쳤던 몸이 살 것 같아지고, 드라마 같았던 여름의 시간과도 조금 거리가 생기면서 아침저녁으로 하늘 쳐다보는 낙으로 지내는데 문득 스치는 시구가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이다. 다형 김현승의 시이다. 시간의 흐름이 유독 잘 느껴지는 가을에 시인이 간구하는 세 가지가 기도와 사랑 그리고 고독이다.
기도는 우리를 시간 안에 머물게 한다. 시간과 경쟁하기를 포기하면서 마음은 겸허해지고, 겸허해진 마음은 남은 시간동안 지키고 싶은 관계에, 사랑에 더 민감하게 해준다. 그리고 마지막 절의 고독은 다시 한 번 기도로 돌아가게 한다. 그리하여 다시 겸허해진 마음으로 사랑을 택하는 순환이 이루어진다. 이 시에서 시간은 사랑에 대해서만 언급이 된다. 사랑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해서/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해달라고 시인은 간구한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왜 그녀는 같이 일하던 그 누구하고도 관계를 잘 마무리 지으려 하지 않았을까. 하려 했는데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일까, 아니면 덧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까. 만약 후자라면, 그는 관계란 하루아침에 일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짧은 시간 안에 해낼 수 없는 일의 수고라면 당연히 덧없게 느껴질 밖에.
사랑도 연습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여러 번의 가을이 있는 것은 푸르름의 기운이 황금의 기운으로 변하는 이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이 기도를 반복하며 또 한 번 사랑을 다짐하라는 신의 배려인지도 모른다. 지금 이 가을에 살아있는 사람들아, 너희에게는 아직 사랑할 시간이 있다, 고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 선선한 바람과 함께 우리를 채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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