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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제목 | 언덕 위 하얀 집 | ||
| 분류 | 그리스도인의 삶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4-1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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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 하얀 집
by 필립 정 2024-10-15
빈센트 반 고흐가 프랑스 아를의 노란 집에 살았다면, 난 언덕 위의 하얀 집에서 살았다. 상상 속에서 말이다. 그 집을 국민학교 3, 4학년 때쯤 처음 전과 책에서 본 기억이 난다. 1960-70년대의 ‘전과’는 교과서 문제의 풀이 법과 해답지가 담긴 두꺼운 교재였다. 전과 앞 쪽에 몇 페이지에 걸쳐 다양한 사진들이 실려 있었다. 그때 나를 완전히 매료 시켰던 풍경 사진이 하나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지평선에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 있고 가운데로 들판을 가르며 넘실거리는 시냇물이 흐르고 아득히 멀리 구름에 쌓인 산봉우리 몇이 징검다리처럼 내려앉은 곳이었다. 그 언덕 위에 작은 집 한 채가 있는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였다.
종이 사진에 있던 그림이 몇 년이 지나 꿈틀대며 나에게 찾아왔다. 마리아 수녀와 아이들이 춤추며 노래를 부르던 그 푸른 언덕과 폰 트랩 대령과 그 가족이 자유를 찾아 넘던 그 잘츠부르크의 풍경들이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다가왔다. 나는 명절 때마다 TV로 보고, 영화로도 몇 번씩 보고 나중엔 DVD로도 보며 내 가슴 속에 그려 넣었다. 내 어릴 적 그린 모든 풍경화는 언덕 위의 하얀 집 밖에 없었다.
나는 어린 시절, 남산 아래 오밀조밀 대문도 없이 집 안이 다 드러나 보이는 산동네에 살았다. 누구나 서로 알 수밖에 없는 정겨운 곳이었지만 이웃 아줌마 아저씨의 다투는 소리까지 온 동네에 쩌렁쩌렁 다 들리는 마음이 편치 않은 곳이기도 했다. 그 다툼이 심해지면 숨이 막혀오고 어쩔 때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 부모님도 경건한 성도였지만 가난에서 오는 다툼을 결코 피해가지는 못하였다. 부부 싸움이란 게 끝에 가서는 아이들 혼내는 걸로 끝날 때가 다반사였다. 이 반복된 싸움은 어린 나에게 터지고 굳기를 반복하는 생채기 딱지처럼 깊게 내려앉아 버렸다.
이런 나에게 사진 속 유럽의 조용한 마을은 도피처였고 천국이었다. 나는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가 누워 뒹굴기도 하고 뛰어놀아야 현실을 잊을 수가 있었다. 1970년대 말 미국의 전원 드라마 ‘초원의 집’ 을 TV에서 방영하였다.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야 내가 원하던 세상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에는 먹는 장면이 유독 많이 나왔다. 주근깨 소녀 로라네 가족의 밥상 위엔 마른 빵 조각과 옥수수죽만 덩그러니 있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어떨 때는 삶은 감자와 소금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겨우내 먹을 것이 없어 걱정하는 로라 가정의 모습은 우리 동네의 여느 가정과 다름없어 쉽게 동화되어 버렸다. 그런데 아이들은 미안해하는 부모를 바라보며 마른 빵을 맛있게 입에 넣고 이를 바라보는 아버지 찰스의 측은하고 인자한 눈빛은 너무 낯설어 처음에는 이상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그 장면들이 시간이 갈수록 떠오르며 거실에 걸어놓은 따듯한 가족사진처럼 지금도 내 마음에 박제되어 걸려있다.
내가 어머니에게 자주 혼났던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다툼 후에 어머니는 장남인 내게 위로를 받고 싶으셨나 보다. 그러나 어린 나는 바짝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보시며 “지 애비 닮아 인정머리라고는” 하셨다. 나는 그런 현실이 싫어 언덕 위의 하얀 집으로 숨는 시간이 길어져만 갔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크면 나 같은 아이는 현실에서 도망치기 마련이다. 내가 처음 이런 집에서 못살겠다고 외치고 뛰쳐나온 게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그날로 붙잡혀 들어왔지만 그 후로 난 여러 번 집을 나가야 숨이 쉬어졌다.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지치도록 걸어가 끝이 안 보이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작고 하얀 집을 하나 그려 넣고 해가 질 때까지 바라보다 길 위에서 잠들기도 하였다. 잠이 들면서 다시 눈을 뜨지 않았으면 했다.
그렇다고 그때의 삶이 항상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였다. 여름 성경학교에서 암송 대회가 열려 마태복음 5, 6, 7장을 외워야 했다. 산상수훈의 구절들이 어려워 마치 어린아이가 추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태복음 5장 14절)는 편하게 다가왔다. 단지 언덕 위의 하얀 집과 같은 산 위 동네라는 이유로 말이다. 열 살 꼬마였던 나에게 산 위의 동네는 그냥 내가 살던 동네처럼 느껴져 마음에 남겨졌다.
나는 어린 시절을 집과 이웃과 교회를 구분할 필요 없는 산동네에서 보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교회로 달려가 친구들과 실컷 뛰어놀다 저녁 먹을 때나 되어서 돌아오곤 하였다. 어머니 따라서 새벽기도에 가 그 옆에 누워 기도 소리를 들으며 잠자는 게 너무나 편하고 좋았다. 베드로, 요한이란 이름이 친척 아저씨 이름보다 더 친근하게 느껴졌고 동네 아저씨들이 다 김 집사, 이 집사로 불렸고, 그분들 집에 시도 때도 없이 들어가 끼니를 때웠으니 내 집과 이웃 집, 교회의 개념이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금요일 저녁마다 모여 드리는 동네 구역 예배에는 동네 사람들이 다 모였다. 구역장인 아버지의 설교와 기도가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찐 계란, 고구마, 감자가 상에 올라와 정겨운 얼굴로 나눠 먹었다. 매일 지지고 볶고 싸우다 구역 예배 와서 눈물 흘리고 싸웠던 얘기하며 꾸역꾸역 찐 고구마를 성찬식 빵처럼 떼어 나누던 그 공동체에서 약간의 희망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짧게 스쳐가는 그림이 너무 좋아 자주 상상하다 보니 언덕 위의 하얀 집은 나도 모르게 점점 산 위의 동네 교회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가난의 운명을 피해 숨었던 언덕 위의 하얀 집에서 여럿이 서로 신앙으로 의지하며 모여 살아가는 산 위의 동네 교회가 꿈이 되어가고 있었다.
1970-80년대를 지나며 한국 경제가 조금씩 발전을 하고 있었지만 철저히 우리 가족을 비켜갔다.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한 번도 잘된 적이 없어 산동네를 옮겨 다니며 살아야 했다. 가난한 소년에게 그 어떤 꿈도 다 사치가 되어 버리자 나는 점차 반항적이고 거친 청년으로 변모해 갔다. 내 구차한 삶이 부끄러워 다른 나로 위장하며 하루하루를 버텨갔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신학을 하는 것이었다. 신학을 하면 좀 나아질 거라 믿었지만 그저 녹슨 차에 기름칠하기에 불과했다.
그 상태로 목회자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가난했던 시절의 어느 날 “주님, 저는 차라리 평생 집을 사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뱉어 버리고 말았다. 신학적 외피로 가슴 속 상처를 가린 채 냉소적 논쟁을 하며 폭발 시키던 젊은 목사의 갑작스런 서원이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가 부의 불평등 문제였다. 그때 지대의 상승으로 불로소득을 얻어 사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빈부 격차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을 목격하고 이런 현실에서 나는 차라리 집을 사지 않겠다고 덜컥 서원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 나는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을 읽고 토지의 사유화가 빈부 격차를 증가시킨다고 믿고 설익은 정의감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목회하는 친구들과 “자본주의 체제에서 교회가 제대로 존재 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종종 논쟁을 벌였다. 시비를 거는 사람은 항상 나였다. 나는 교회와 자본주의가 공통으로 포함하는 원소들을 눈 씻고 찾아보려야 볼 수 없어서 나는 그냥 적과의 동침이라고 우기곤 하였다. 오랜 기간 목회자로 사역하며 지금까지도 이 의심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런 회의주의자로 살던 나의 공격성은 훗날 목회를 떠나서야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생계유지를 위해 잠시 다른 직업을 병행하면서 빈손으로 시작하니 내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힘든 노동으로 단순하게 하루를 살며 기도하고 상처받은 나를 보며 그 억지스런 호기로움이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온 것임을 깨닫고 붙잡았던 것들을 하나씩 포기하기 시작하였다. 살아온 만큼 털어내야 오늘 하루가 편했다.
이제 그 불같던 열정으로도 붙잡을 수 없는 세월이 저만치 흘러 남겨진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었다. 그 젊은 날의 고집도 다 시들어졌는데 나는 여전히 그 철없이 던진 서원을 기억하며 무주택자로 남아 있다. 그간 형편이 되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집을 살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 언덕 위의 하얀 집을 살 여유도 이제 생겼다. 하지만 어린 나의 상상 속 그 집은 이제 세상의 건물로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 그 집은 이제 상처 입은 아이의 도피처도 아니고 세상을 등지고 약자들끼리 모여 사는 그런 마을도 아니다. 그 아이가 주의 영원한 보호하심 아래 누리는 위로이고 핍박 받고 소외된 자들이 그의 통치로 이루어진 평화이다. 그 통치가 기둥이 되고 샬롬이 벽돌이 되어 나와 이웃의 삶에 임하는 그 나라가 내게는 이제 언덕 위의 집이 되었다.
지금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 나와 씨름하기보다는 벌레와 동물을 대하며 하나님의 세밀한 통치와 섭리가 임하는 창조 세계를 보고 살아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내게 임하는 섬세한 손길을 내 피부로 느끼며 산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눈으로 그들을 보려고 애쓰니 창조주에게 호소하는 자연의 언어가 문득 환상같이 스쳐가며 내 연필 끝에서 풀려 나간다. 그리고 주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면 죽어가던 우리의 삶도 자연도 회복이 될 것을 믿는다.
나는 아직도 산 위의 동네를 찾아다닌다. 멀리서 바라보면 정겹고 따듯하게 나에게 다가와 안겨 오는 그 풍경이 너무 좋다. 예전에는 다가가면 멀어지더니 지금은 쑥 들어와 스며들어 버린다. 슬펐던 동화가 행복한 드라마로 끝나는 내 삶의 파노라마는 주가 오셔서 영원히 다스리시는 종말론으로 끝이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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