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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제목 | 형식 없이는 내용도 없다 | ||
| 분류 | 예술과 문화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4-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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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 없이는 내용도 없다
내가 번역한 책_현실, 하나님의 세계 by 양혜원 2024-10-07
번역을 전업으로 하던 시절 두 번의 전환기가 있었다. 첫 번째 전환기는 홍성사에서 출간한 대천덕 신부의 개척자의 길을 번역하게 되었을 때였는데, 이 책을 필두로 틈틈이 파트로만 하던 번역 일에서 벗어나 전업 번역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두 번째 전환기는 이번에 소개하는 책, 현실, 하나님의 세계를 번역하면서 맞이했는데, 이 책의 번역을 계기로 나는 ‘유진 피터슨의 번역가’가 되었다.
이 책을 번역하기 전에도 유진 피터슨의 책을 두 권 번역하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책은 내 번역 스케줄에 맞으면 하는 책이었다. 하지만 현실, 하나님의 세계를 필두로 유진 피터슨의 책은 다른 스케줄을 비우고 하는 책이 되었고, 그의 책은 내게 우선적으로 번역 의뢰가 들어왔다. 그리하여 현실, 하나님의 세계를 1권으로 하는 그의 영성 신학 시리즈를 비롯하여, 그의 설교집과 회고록, 그리고 최근에는 메시지 묵상성경에 이르기까지 총 14권의 유진 피터슨 책을 번역하게 되었다. 나아가 그의 책을 해설하는 유진 피터슨 읽기: 삶의 영성에 관하여도 출간하였고, 미국 종교학회에서 유진 피터슨 번역에 대한 페이퍼를 발표하기도 했으니, 제법 한 저자에 몰입한 번역가였던 셈이다.
피터슨의 글은 번역하기 쉬운 글은 아니다. 한없이 늘어지는 문장이 제법 곤혹스럽고, 번역하기 힘든 로컬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표현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관점은 매우 신선했다. 교회 다니는 사람도 한 번씩은 지루하게 느껴지는 종교를 전혀 지루하지 않게 풀어내는 그 신선함 때문에 번역할 생각을 하면 골머리가 아프면서도 늘 기꺼이 번역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미국 유학을 계기로 피터슨에 대한 이해가 한층 더 깊어졌다. 책의 글자 차원의 이해에서 더 깊은 맥락 차원의 이해로 들어갔다고나 할까. 그가 글을 썼던 현장의 문화를 겪고 나니 그의 글이 더 잘 이해되었다.
그렇다고 당시 나의 번역이 미흡한 번역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궤변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저자의 글에 대한 소화의 깊이가 반드시 더 좋은 번역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것이 번역의 큰 아이러니다. 언어에 표면과 이면이 있다면, 번역은 표면을 잘 전달하는 일이다. 번역은 주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의도한 바는 이런 것이라고 구구절절이 주석을 달지 않고 언어의 표면을 깔끔하게 옮기는 일이 번역이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이해를 그 당시에 했었어도 번역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 그의 글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진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번역보다는 해설서를 쓰고 싶은 심정이다. 사실 그래서 미국 유학 중에 유진 피터슨 읽기를 집필한 것도 있다.
현실, 하나님의 세계는 원래 이종태 선생이 번역을 하기로 계약했던 책이다. 그런데 그가 유학을 하면서 시간이 여의찮아 공역자를 구하게 되었고, 그 공역자로 내가 섭외되었다. 당시의 편집자가 꼭 나에게 공역을 맡기고 싶다고 쓴 편지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아마도 처음에는 이종태 선생이 이 책을 비롯하여 이후에 나오는 영성신학 시리즈를 다 번역할 셈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유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번역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고, 그래서 공역자인 내가 이후의 영성 신학 시리즈를 맡게 되었다. 보통 번역서는 원서가 나오고 몇 년 후에야 나오는 게 당시의 관례였는데, 아마도 처음으로 미국 출간과 큰 시차 없이 바로 원고를 받아서 번역 출간한 책이 이 시리즈가 아닌가 싶다. 지금은 그렇게 출간되는 책이 제법 있지만, 당시에는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 미국 출간 일정이 언제 즈음인지 출판사가 알려주면 나도 그에 따라 번역 일정을 비워두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시작된, 나를 섭외한 편집자와의 인연은 영성 신학 시리즈 3권인 그 길을 걸으라까지 이어졌다. 약간 길을 새서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영성 신학 2권인 이 책을 먹으라를 번역하면서 이 편집자와는 특별한 관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번역은 직역과 의역으로 나누어서 이해하는데, 직역은 단어 대 단어 번역이라고도 하고, 의역은 의미 대 의미 번역이라고도 한다. 또 다르게 표현하면, 직역은 독자를 원문으로 끌고 가는 번역이라고 하고, 의역은 원문을 독자에게로 끌고 가는 번역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피터슨의 영성 신학을 낸 출판사는 직역을 선호하는 출판사였고, 그래서, 예를 들어, 영어로 단어가 세 개이면 한글로도 세 개의 단어로 번역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번역하면 한글로는 자연스럽지 못한 경우들이 제법 있다. 그래서 영어 원문에는 세 개의 단어이지만 한글로는 두 개의 단어로 번역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을 편집자가 지적하고 나섰다. 번역이 누락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왜 누락이 아닌지를 설명했고, 그렇게 편집자와 몇 차례 의견이 오가는 가운데 내가 편집자에게 제안을 했다. 번역에 들어갈 책을 편집자도 같이 읽으면서 책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고 몇 가지 중요한 번역의 방향과 표현들에 대해서 번역 시작 전에 합의를 하자고 한 것이다. 내가 세 개의 단어를 두 개의 단어로 번역하기로 판단하는 데에 대한 설명으로는 그 길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전에 쓴 글에서 번역가와 클라이언트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과감하게도 클라이언트에게 시간을 요구하며 설득 작업에 들어간 셈이다. 사실 편집자도 근무 외 시간을 내야 했지만, 번역가인 나도 그런다고 번역료를 더 받는 것도 아닌 일에 시간을 쓰는, 어찌 보면 바보 같이 비생산적인 일에 우리 둘은 합의하여 매주 만나 같이 영성 신학 3권인 그 길을 걸으라를 읽었다.
이런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공동체’라는 것이 상당 부분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기독교 출판사도 수익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교회의 성장과 성숙에 필요한 책을 낸다는 기본적 자세를 가지고 있다. 피터슨의 책은 다른 저자의 책과 달리 매우 빠른 시간에 거의 전권이 번역되었다. 그의 책은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에 한국 교회의 청장년 세대가 목말라하던 무엇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피터슨의 책에서 맞닥뜨린 ‘신선함’도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기독교를 포함하여 보통 종교를 대할 때 사람들은 어떤 장벽 같은 것을 느낀다. 이것은 평범한 것과는 다른 무엇이다라고 하는 인식이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래서 종교에 끌리는 것도 있다. 만약 종교가 일상과 구분이 하나도 안 되는 것이었다면 별로 매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은 이 장벽 때문에 종교가 멀게 느껴진다. 피터슨 글의 매력은 이 장벽을 허무는 동시에 종교의 다름도 유지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가 일상에 스며들게 하면서도 일상과는 구분되는 종교의 매력을 전달한다. 그의 영성신학 시리즈 1권 현실, 하나님의 세계의 서두에 그가 소개하는 영국의 예수회 신부이자 시인이었던 제라드 맨리 홉킨스의 시는 그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로 그가 선정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도 그 시의 제목을 따라 ‘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이다(이 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의 책 유진 피터슨 읽기를 참조 바란다). 이 제목을 ‘현실, 하나님의 세계’로 번역한 것인데, 저자의 의도와는 좀 다른, 그 당시 한국 교회 3, 40대의 의식이 이 제목의 번역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고 생각한다.
현실이라는 말은 이상 혹은 꿈과 대비되어 쓰이기도 하고, 관념과 대비되어 쓰이기도 한다. 한국에서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치고 학생 운동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하는데, 그 당시 학생들의 사상 학습에서 추상적 관념은 배격의 대상이었고, 물적 토대의 사회, 정치적 ‘현실’에 눈뜨는 것을 무척 강조했다.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교회에 다니는 청년들은 제법 고민에 빠지기도 했는데, 사회정치 운동을 공산주의와 동일시하는 분위기에서 반공 노선에 선 교회에서는 그런 노선의 정치 참여를 불온하게 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피터슨의 책이 번역되기 시작되는 1990년대 말에는 그런 분위기가 거의 사라진 후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사회참여에 대한 교회의 논쟁은 계속되었고, 어쩌면 후일담처럼, 그때 못 푼 숙제를 풀 듯 피터슨의 책에서 현실 참여의 기독교적 방법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1980년대에 식자들이 쓰던 ‘현실’이라는 말은 그냥 일상적 현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치적 참여를 통해 변화시켜야 하는 사회적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 세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이 책을 출판하면서 ‘현실, 하나님의 세계’라는 제목을 붙였을 때는 다분히 그런 정서를 담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일상, 하나님의 세계’라고 해도 되는데 말이다.
이 책을 번역한 한국의 기독교 사회가 현실 참여에 대한 화두를 안고 있었다면, 피터슨은 미국 사회에서 영적 혼란의 현실을 보고 있었다. 정체도 없는 이상한 것들이 영성의 이름으로 둔갑하여 사람들을 홀리고 있다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이 책의 부제가 ‘A Conversation in Spiritual Theology’인데, 그는 영성이 길을 제대로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학이 필요하고, 신학이 말라빠진 나무 껍데기처럼 되지 않고 촉촉하게 살아있기 위해서는 영성이 필요하다고 이 책의 서두에서 말한다. 간단한 말이지만, 나는 이 말처럼 영성 신학을 잘 설명하는 말이 또 있을까 생각한다.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말도 있고, 비슷한 의미에서 종교는 편협하고 영성은 포괄적이라고도 말하지만, 피터슨은 종교라는 껍질이 없이는 영성도 없다고 했다. 쉽게 말해, 우리를 구속하는 것 같은 형식이 없이는 우리가 지키고 싶은 내용도 지킬 수 없다는 뜻이다.
미국 사회는 지금도 계속 다양한 영성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변함없이 정치적 혼란의 현실을 살고 있다. 어떤 형식으로 어떤 내용을 지켜야 이 현실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그때 나와 그 편집자가 보냈던 그런 바보 같은 시간을 쓸 사람들이 더 많아져야 이에 대한 답도 찾아지지 않을까. 그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세 단어가 두 단어가 되는 것에 대한 이해를 나눈 것은 물론이고, 그 책의 메시지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해 몇 가지 중요한 단어들의 번역에 합의하면서,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던 바보 같은 시간의 작은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상투적인 말을 남기며, 긴 여름 끝에 와서 더 반가운 이 가을에 현실, 하나님의 세계와 그 길을 걸으라의 일독을 추천 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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