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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제목 | 부부의 침실을 위협하는 포르노 폭력 | ||
| 분류 | 그리스도인의 삶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4-0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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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침실을 위협하는 포르노 폭력
by Joe Carter 2024-09-30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성교육 자료는 포르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대부분의 젊은이가 섹스와 성 행위에 대한 태도가 비록 100퍼센트는 아니더라고 해도 대체로 포르노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물론 이게 새로운 건 아니지만, 문제는 점점 더 폭력적으로 바뀌는 포르노가 초래하는 위험성이다.
수많은 연구에서 이런 사실은 확인된다. 예를 들어, Archives of Sexual Behavior에 게재된 2020년 연구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포르노 사이트 두 곳에서 무작위로 뽑은 비디오 중 각각 44.3퍼센트와 33.9퍼센트의 콘텐츠에서 여성 신체에 대한 공격이 들어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포르노 비디오의 3분의 1에서, 아마도 거의 절반에 달하는 비디오가 어떤 종류든 간에 폭력을 묘사하고 있으며, 폭력을 당하는 대상의 97퍼센트가 여성이다.
포르노 속 폭력의 일반화가 현실 세계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삼 년 전에 Journal of American College Health에 게재된 연구에 따르면, 여성 대학생 26.5퍼센트가 가장 최근의 성적 접촉에서 목졸림을 경험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남성의 24.8퍼센트가 가장 최근의 성적 접촉에서 파트너의 목을 졸랐다고 보고했다. (중요한 건 이게 평생의 섹스 경험에서 그런 적이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가장 최근 성적 경험에서 그랬다고 응답했다는 사실이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섹스 중 폭력 관행이 삼 년 동안 약 50퍼센트 증가했다. 조사에 참여한 여성의 약 3분의 2(익명으로 처리된 “중서부 주요 대학”의 학생 5,000명)가 성관계에서 한 번은 목졸림을 당했다고 말했고, 3분의 1은 가장 최근 섹스에서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목졸림을 당했을 때가 열두 살에서 열일곱 살 사이였다고 대답한 비율이 4분의 1에서 40퍼센트로 급증했다.
남자들은 왜 그러는 걸까? 포르노에서 보고 여자들이 그걸 원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 여자들은 왜 저항하지 않는 걸까? 그들도 포르노에서 보고 자신들도 그걸 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은연 중에 외부의 힘이 우리의 욕구를 형성한다. 오늘날 성적 욕망을 형성하는 데 포르노만큼 널리 퍼져서 영향력을 끼치는 매체는 없다. 한 연구에 따르면 남자는 보통 하루에 5-17분, 즉 일 년에 30-103시간 동안 포르노를 시청한다고 한다. 열두 살에 포르노를 보기 시작하면 서른두 살이 될 때까지 무려 600-2,000시간 분량의 포르노를 본다는 소리이다. 그 사람의 의식은 자연스럽게 이십 년에 걸쳐서 포르노 산업에 의해 형성된다. 그리고 포르노가 점점 더 극단적인 성행위 이미지와 사례를 제공함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의식 역시 거기에 맞춰서 바뀌어간다.
문제는 한 남자의 성격 또는 성적 취향이 아직 완전히 형성되기도 전에 포르노 이미지가 먼저 주입된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신의 진짜 욕망과 포르노 속 욕망을 혼동할 수밖에 없다. 포르노 속 모습을 자신도 원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포르노 산업에 의해 그런 모습을 원하도록 만들어졌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관계 중에 타인은 말할 것도 없고 나 자신에게도 고통을 주고 싶어하도록 창조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욕망이 아니며 성적 행위 중에도 결코 자연스러운 부분이 아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그런 행위를 변태라고 불렀다. 폭력적인 행동은 아름답고 선해야 할 섹스의 본질을 추하고 사악한 것으로 변질시킨다. 그런 행동은 한 몸이 되는 과정으로서의 섹스의 목적 자체를 왜곡시킨다.
부부관계에서 폭력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성적 친밀감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폭력 행위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성 관계 중에 발생하는 폭력이 결혼의 친밀함이라는 하나님의 설계와 양립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 세 가지이다.
1. 섹스는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은 폭력을 금지했다.
폭력에 대해서 성경은 많은 이야기를 한다. 한 구절만 살펴보자. 잠언 3:31은 “폭력하는 자를 부러워하지 말고 그의 길을 택하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폭력적인 자의 길을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극히 드문 일이지만,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나 또는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이웃을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폭력을 써야할 때도 있다. 하지만 부부 관계라는 맥락에서 폭력은 아예 설 자리 자체가 없다.
2. 폭력으로 사람은 다친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의 생명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여섯 번째 계명은 이웃의 신체 안녕을 보호하라고 명령한다(출 20:13). 그런데도 왜 우리는 그렇게 많은 해를 끼칠 수 있는 성 행위 중 폭력에 관여하는 걸까?
질식, 즉 성적 목졸림과 같은 행위는 매우 위험하며 심각한 건강 위험과 심지어 사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신체적 위험에는 산소 결핍, 심장 마비, 뇌졸중, 인지 장애, 혈관이나 후두 손상, 심지어 사망도 포함된다. 심리적 손상 또한 덜 해롭다고 할 수 없다. 이처럼 위험한 성적 행위에 관여하면 불안, 우울증, 심리적 고통, 심지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3. 섹스의 본질은 폭력과 정반대이다.
폭력은 해로움, 통제, 두려움을 특징으로 한다. 반면 친밀감은 신뢰, 상호 존중, 정서적 친밀함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폭력은 부부관계라는 친밀감과 양립할 수 없다. 배우자에 대한 사랑은 상대를 향한 온유함과 존중과 배려이다. 신성한 결혼의 친밀감 안에 폭력, 강압 또는 학대를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친밀감은 부부가 해로움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낄 때만 커질 수 있다.
결혼 전 섹스에서 성 행위 중 폭력에 맛을 들인 사람의 경우라면 그런 폭력을 싫어하는 배우자와 결혼하는 경우에 부부관계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데비 허베닉은 질식이 젊은 여성들이 가장 자주 언급하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성행위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섹스 중에 실제로 공격을 받는다고 느끼는 여자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 어떤 남자들에게는 목조름이 유일한 성적 경험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에게는 목을 조르기 위해서 꼭 옷을 다 벗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목조르기의 위험성을 똑바로 모르는 여자들은, ‘자꾸 내 목을 조르고 때려서 어떻게든 잘 넘기려고 그냥 한 번 맘대로 하라고 놔뒀던 거야’라는 식으로 말할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동의가 있고 쾌락이 보장된다면? 그러니까 상대가 목을 조르는 것과 같이 폭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행위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우리 중 한 명이 그런 행위에서 확실하게 쾌락을 얻는다면?”
세속 문화에서 동의는 성행위에 대한 유일한 제약 조건이다. 두 사람이 동의했다면, 즉 특정 성행위에 하도록 허락했다면, 그 행위는 허용된다. 거기에는 그 어떤 질문도, 판단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들을 향해서 아니다라고 말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며 “적 긍정성” 규범에도 어긋난다.
말 그대로 동의라는 건 최소한의 기준에 불과한데도, 점점 더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기준을 받아들이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단지 두 사람이 모두 동의한다면, 그리고 둘 중 한 사람이 확실한 쾌락을 얻을 수만 있다면, 결혼 생활에서도 폭력을 동반한 성적 행위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그런 생각 자체가 죄로 인한 도덕적 추론의 타락 때문이라는 현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진리와 은혜와 소망의 지평을 더 넓히자
기독교 바깥의 상담사들조차도 성 행위 중 폭력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한 연구는 다음 결론에 도달했다. “임상의들은 최근에 일어나는 성행동 속 잠재적인 변화, 특히 해를 끼칠 수 있는 질식과 같은 변화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는 타락한 성적 욕망에 갇힌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가 있다. 포르노에 영향을 받아 폭력적인 성적 욕망에 갇힌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희망과 치유를 전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거짓된 이미지를 버리고 건강한 친밀감을 주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말씀의 진리로 삶을 채우도록 도와야 한다.
물론 포르노가 남성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다. 포르노에서는 아예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폭력적이고 품위를 훼손하는 행위로 인해서 많은 여자가 자기도 그런 요구에 순응해야 한다는 엄청난 압력을 느낀다. 공격적인 성행위에 동의하지 않으면 신사임당이라는 놀림을 받을지 모른다고 느낀다. 또는 남편의 관심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모든 성적 강압은 남편이 아내에게 보여야 할 사심없고 희생적인 사랑과는 정반대이다(엡 5:25).
결혼을 준비 중이거나 이미 결혼한 젊은 그리스도인을 돕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에 대해 정하신 설계와 그 설계가 폭력적이고 포르노에 물든 문화로 인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에 관해서까지 솔직하게 논의해야 한다. 행여 포르노 속 성 행위에 대한 욕망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건 결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님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 그런 욕망이 어떻게 외부의 영향에 의해 형성되었는지를 사랑의 마음으로 가르쳐주어야 한다. 진정 만족스러운 부부관계의 친밀함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섹스에서만 가능하다. 남자와 여자가 한 몸으로 합쳐지는 아름답고 거룩한 결합이다.
목사, 부모, 상담사는 특히 오늘날 성적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젊은 세대에게 이 진리를 담대하게 선포해야 한다. 성 관계 중 폭력 금지를 포함해서 성에 관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가 우리의 유익과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보여줘야 한다. 교회 차원에서도 오로지 해악만 끼치는 위조품에서 사람들을 은혜로 구출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성이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 설득력 있는 비전을 그려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는 포르노에 물든 문화에서 살고 있다. 그렇기에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고후 10:5) 우리 마음을 성에 대한 하나님의 설계에 맞춰야 한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는 문제는 단지 포르노에서 조장되는 폭력적 성행위라는 차원을 넘어선다. 우리 각자는 세상의 왜곡된 성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였던 죄악을 먼저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결혼을 향해 의도하신 아름다운 친밀감을 추구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과 친밀감에 대한 관점을 근거로 삼을 때에만 우리는 성적으로 타락한 오늘날 문화의 거짓말과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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