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한강의 사상이 주목받고 있다. 그녀는 오늘의 분주한 공간과 화살 같은 시간의 강 속에 나올 틈 없던 수많은 질문들을 꺼냈다. 인간에 대해 끝없이 사유하는 그녀의 글들에서 큰 주제 중 하나는 ‘평안’이다. 그녀뿐 아니라 수많은 현대인들에게 평화주의, 또는 비폭력주의로 불리는 이상적 사상은 어떤 종류의 평화를 외치는 것일까, 그리고 평화를 외치는 이 세상에 성경의 영원한 안식의 세계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물에게 가하는 폭력을 끔찍이 싫어하는 시대적 사조 앞에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구약의 제사법, 즉 살갗을 벗이고 각을 떠 태우고 피를 부어야 하는 제사의 형식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쟁과 끝없는 인간의 정복의 이기심에 지친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남김없이 사람과 가축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나는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가? 흩뿌려지는 피만큼 끔찍한 인간의 죄악, 그리고 대속의 법칙이 없이는 깨끗해질 수 없는 절대자의 영원의 세계를 납득시키려면 얼마의 노력과 지혜와 시간을 예상해야 할까?
때로 말의 설명은 아무 힘이 없다. 특히 영원, 안식, 영원하신 하나님의 세계와 현존을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조심스럽지만 이것은 예술의 영역이다. 이 가을, 영원한 평안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을에 어울리는 예술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떠오르는 수많은 예술가 중 두세 명으로 간추리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지만, 이 늦가을에 어울리는 사람과 작품을 먼저 만나보자.
빛의 예술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 1943~)은 독실한 퀘이커 교도로 어린 시절부터 빛의 미학을 따라 온 인생을 걸어왔다. 빛이라는 매개체를 연구하기 위해 지각심리학을 비롯한 천문학, 수학, 미술을 공부하고 최초로 ‘빛’을 주연으로 끌어올리는 작품을 시연한 작가로도 유명하다. 한국인 아내를 두고 있으며 한국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는, 현재 한국 복음화의 역사적 근원지인 신안군의 각 섬마다 “1도 1뮤지엄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에 설치되어 있는 그의 ‘빛의 예술’ 전시는 총 네 개의 방을 경험하는 체험전시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그 중 영원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영역은 독일어로 간츠펠트(Ganzfeld), 즉 ‘완전한 영역(Complete Field)’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인간의 지각의 반응과 심리를 이용한 고도의 기술적 공간이다. 터렐이 의도한 것은 인피니트(infinite), 즉 끝없는 세계다. 무한히 확장되는 듯한 공간 속 지각과 감각을 경험하도록 강렬한 빛으로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유도한다.
개인적으로 이 방에서의 영원성에 대한 체험은 생각보다 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30분의 체험 전시로 영원과 빛 되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겠지만, 카이로스의 하나님은 단 1초의 순간에도 영원을 펼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이 영원에 대한 경험이 놀라운 이유는 이 소망을 현실로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 현실은 두 번째 전시방 웨지워크(Wedgework)에서 이어지는데, 이 방은 완전한 어둠 속을 걷는 것부터 시작해 잔잔한 빛의 입자를 직접 만져보도록 설계되었다. 첫 번째 방에서 경험한 영원을 향한 소망이 어둠 속 현실에서 어떻게 피어날 수 있는지를 직접 보고 빛의 입자를 만져본다는 것, 수증기 가득한 빛의 향을 맡을 수 있다는 것, 처절한 현실 속에서 내면의 신앙의 빛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놀라운 터렐 예술의 힘이다.
그의 세 번째 전시실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에서는 구더기와 벌레 가득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비춰진 하늘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환희에 젖을 때 즈음, 그 하늘이 내 발 밑에 다가와 있으며 심지어 걸을 때마다 따라다니는 신의 존재를 만날 수 있다. 공학과 수학의 연구로 신의 내주하심을 시현했다는 것에 박수를 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마지막 전시실 호라이즌룸(horizon room)은 마치 천국의 계단을 시현한 곡선미 가득한 공간에 3차원의 세계를 경험케 한다. 하늘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자연의 공간과 만나고, 자연과 하늘의 수평선의 경계에서 드나드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된다.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연결이 없다면 한낮 썩어질 유기적 허무한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해 보길 바란다.
신학 안에서 영원이라는 주제는 한때 굉장한 논란의 주제였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발견으로 시간의 과학이 발전되며, ‘시간 속에 어떻게 영원하신 하나님의 개입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 새롭게 필요했던 것이다. 신학자들은 두 의견으로 갈렸다. 전통적 입장은 ‘영원하신 하나님은 타임리스(timeless)하시며, 시간과 벗어나서 계신 하나님의 속성을 주장했다. 반면 칼 바르트와 같은 현대 신학자들은 인피니트(infinite) 하나님을 주장했다. 그들은 시간의 끝없는 연속 개념의 영원을 설명하는 것이 과학과 부딪히지 않는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믿었다.
오늘까지 영원에 대한 완전한 신학적 설명은 불가능하며, 사실 많은 개신교 학자들은 이를 규명하려고 시도하지도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위르겐 몰트만이 그린 영원의 개념을 좋아하고 지지한다. 원래 본성이 시간과 벗어나서 계신 하나님, 그리고 시간을 뚫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래서 지금의 시간개념과 동일하지는 않아도 시간초월의 하나님과 끝없는 영원의 시간의 개념이 연합되어 영원히 이어질 하나님 나라의 시간 말이다.
이 시간을 음악으로 표현한 영국의 작곡자가 있다. 음악가이자 철학자, 마이클 티페트(Michael Tippett1906-1998)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1, 2차 세계대전의 시기로 그는 1차 세계대전 직후 청소년기를 보내며 극도의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참전거부로 인해 감옥생활을 했던 그는 현존하는 극단적인 사상을 화합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성정체성의 혼란으로 기독교의 구원론에도 많은 연구를 했는데, 시간과 영원의 연합을 음악으로 표현한 오라토리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환상(Vision of St. Augustine)은 그의 고민의 놀라운 결과물이다.
그는 현존하는 성경 중 가장 권위 있는 라틴 불가타(Vulgate) 성경을 그대로 가져와 텍스트로 사용했고, 가사의 서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보았던 영원에 대한 두 환상에 대한 이야기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보면 그가 시간과 영원, 그리고 창조의 순간의 신비를 알기 위해 얼마나 갈망하고 처절히 기도했는지 알 수 있는데, 그의 간절한 기도가 닿았던 것인지, 그가 남긴 글들 중에 신비의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원에서 영원에 대한 환상을 본 이미지다. 이 환상에 확신을 더하는 환상을 보는데, 두 번째 환상은 어머니와 함께 동시에 보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시한부 인생을 살던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헤어질 준비를 하며 여행길에 오르고, 구원과 내세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슬픔과 허망함에 사로잡혀 있던 이들은, 기적처럼 함께 여관 창밖으로 천사들이 원형으로 움직이며 춤을 추는 영원의 세계를 경험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원에 대한 환상은 몰트만이 주장한 영원의 세계와 일맥상통했고, 티페트는 이들의 생각을 모아 놀라운 영원의 시간을 들려준다.
현대 문학과 예술이 표현하는 허무함의 엔진이 무엇인줄 아는가? 모든 것을 잡아먹는 시간이다. 시간은 지금도 젊음과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없애 가며 사라진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티페트가 주목한 성경에서 표현하는 영원한 세계는 허무함과 정 반대의 개념이다. (1) 음악과 찬양이 있는 시간 속 역동적인 세계(계시록 4-5장)며, (2) 슬픔과 고통이 존재하지 않고(이사야 60-61장), (3) 동시에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 기쁨의 세계다.
티페트는 아마도 음악을 쓰기 전, ‘어떻게 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고 시간이 흐를 수 있는가? 어떻게 동적인 움직이는 이미지와 영원한 순간의 그림이 결합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사라지지 않는 세계라면 반복과 지루함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질문했던 것 같다. 답을 아우구스티누스의 환상에서 찾았고 몰트만의 신학에 힘입어, 반복되지만 새로운, 그리고 화성의 조화 속에 무너진 시간 개념을 융합했다. 특히 천사들이 합창하는 반복구간은 사라지지 않는 시간의 새로움이 가득한 영원한 세계의 성경적 이미지를 표현한다. 그가 사용한 현대의 무조성(음악적 모더니즘) 어법과 전통화성의 결합기법은 신학계에서도 주목한 놀라운 소리다. ‘세상의 끝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몰트만의 말을 끝나는 종지화성 속 열린 화음으로 들려준 것이다.
현대음악이 듣기에 어렵다면 포스트모던 음악의 영원성을 보여준 아르보 페르트(Arvo Part. 1935~)와 그의 음악을 소개한다. 그는 에스토니아 출신으로 러시아 정교회 신앙 속 그레고리오 성가의 정서를 부활시킨 신고전주의 현대음악가로 불린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한 3화음 음악을 즐겨 썼고, 이를 온 세상에 올리는 종소리로 여겨 틴틴나불라(tintinnabula, 종의 울림)라는 작곡기법을 탄생시기도 했다.
그는 평화를 간절히 원해 ‘주님, 평화를 주소서(Da Pasem Domine)’와 같은 좋은 음악을 많이 썼지만 오늘 소개할 곡은 영원을 표현한 ‘거울 속의 거울(Speigel im Spiegel)’이다. 거울 속의 거울은 끝이 없는 이미지를 표상한다. 고요한 3화음으로 현악기와 더불어 끝없이 반복되고 이어지는 아름다운 소리를 이 가을에 꼭 경험해보기 바란다. 그는 한때 아들을 잃고 음표를 적을 수 없어 수년을 멈추었지만, 영원에 대한 소망으로 다시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을 영원의 세계로 인도한다.
개인적으로 이 곡은 수년 전 천식으로 고생하던 네 살배기 딸과의 추억의 음악이다. 밤마다 심한 기침 발작으로 숨 쉬기 어려워했던 시절에 많이 들었는데, 딸과 이별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공포를 천국의 소망으로 이어준 소리의 힘은 놀라웠다. (당시 나는 티페트 곡에 대한 ‘시간과 영원’ 논문을 쓰고 있었다.) 혹시 이 땅에서 사랑하는 딸을 다시는 보지 못할지라도 그곳은 생동감 있고 멋진 삶의 실제 공간이며, 아름다운 사랑의 기억도 사라지지 않고 슬픔과 고통을 모를 만큼 기쁨으로 충만한 나라라는 울림의 소리는 나의 생명줄이었다.
최근 나의 기도 시간을 눈물로 적시는 세 사람이 있다. 온 몸에 암이 퍼져 통증과 복수로 입원해 계신 존경하는 은사님, 그리고 같은 상태로 오랜 시간 병원에 있는 교회 가족, 마지막으로 어린 아이 둘과 젊은 아내를 두고 뒤늦게 온 몸에 퍼진 골육종을 발견한 찬란하도록 젊은 동료다. 그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소망하고 사모하도록 이끌고, 그 나라의 소리를 실제처럼 들려주며, 그 영원한 빛의 세계를 경험하도록 이끄는 예술가들을 소개하고 싶었다.
역사를 공부하며 추상적 믿음은 반드시 타락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실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느끼고 교제하며 동행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망상일지도 모른다. 빛의 영원함을 만져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리로 느끼거나 경험해보지 않겠는가? 이 땅에서 완전한 평화를 찾고자 생명을 걸고 집중하는 모든 이들, 그리고 끝나지 않는 고통과 상처로 인해 빛을 잃은 모든 이들에게도 영원의 예술의 세계로 초청한다. Soli Deo glori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