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holics for Choice라는 낙태 찬성 단체가 최근에 이렇게 주장했다. “마리아에게는 선택권이 있었다.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택권은 임신을 의미하며, 요점은 마리아가 얼마든지 임신을 거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암시하는 바는 이것이다. 마리아처럼 우리도 똑같은 임신에 관한 한 선택권을 가지는데, 그건 다름 아니라 낙태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동정녀 탄생 교리는 낙태 논리를 부인한다. 또한 태내에서 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거부한다. 왜냐하면 성령이 마리아를 감쌈으로써 그녀의 자궁에 새로운 생명이 싹 튼 바로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눅 1:35). 죄가 없음을 제외하고 그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았다(히 2:17; 4:15). 그리고 이 사실은 자궁 속에서 성장한 모든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여기에 대한 대안은 말씀이신 예수님이 의식이 생기고 자생력을 가진 이후에야 제대로 된 육신을 취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이단으로 거부된 입장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내에서 보낸 시간을 회상하시며, “내가 태어날 때부터 당신께 맡겨졌고, 어머니의 태내에서부터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시 22:10) 하신다. 전도서는 “성령이 아이를 잉태한 여자의 자궁 속 뼈에 임한다”고 상기시키며,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드신 분”(전 11:5)이시다. 주님이자 생명의 주인으로서,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태어난 아이의 태에서 새로운 생명을 엮어내신다(시 139:13-16).
태내의 태아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든,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연스러운 성관계를 통해 태어나는 태아를 만드신 분이라는 점을 확신해야 한다. 창세기의 서두에서 분명히 설명하듯이, “아담은 백서른 살에 자기의 형상 곧 자기의 모습을 닮은 아이를 낳고, 이름을 셋이라고 하였다. 아담은 셋을 낳은 뒤에, 팔백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다”(창 5:3-4). 여기서 ‘낳고’ ‘낳은’ ‘낳았고’는 성행위와 출산의 전체 과정을 가리킨다.
‘낳다(beget)’는 일반적인 용어임에도 오늘날 영어에서 잘 쓰이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신학적으로 생명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상상하는 우리의 능력도 약해졌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들의 영원한 아버지이시기에 인간은 시간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 또는 부모와 자녀로서 서로 관계를 맺는다(엡 3:14-15).
오늘날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낳고 낳아지는 관계를 통해 관계를 맺는 방식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아버지와 아들로서 관계를 맺으면서 동시에 이스라엘의 한 하나님으로 존재하는 게 가능한가를 이해하는 데에 적절한 비유를 제공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이 관계는 생명을 의미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영원히 낳으셨고,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영원히 낳아졌기 때문에 영생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심같이 아들도 자기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하셨느니라”(요 5:26)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는 생명의 샘이 있다(시 36:9). 그의 영은 생명을 준다(요 6:63). 영은 자기 안에 생명을 받은 자를 통해 생명의 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 풍부하고 영원한 생명을 품고 계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당신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임이니라”(요 17:3)고 말씀하신다. 생명에서 생명을 아는 것, 바로 영생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짐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 성령이 마리아에게 내려오셨을 때(눅 1:35), 그의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었다. 말씀이신 그 는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동시에 본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를 온전히 치유하기 위해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잉태되었다. 그가 취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면, 그 부분에서만은 그도 우리를 치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모든 인간성을 다 취하셨기에 우리의 모든 부분을 다 치유할 수 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태중에서부터 뛰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를 듣고 아기가 태중에서 뛰었다.“ ”당신의 인사 소리가 내 귀에 들리자 아기가 내 태중에서 기뻐 뛰었습니다“(눅 1:41, 44).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불렀다(눅 1:43).
동정녀 탄생이 보여주는 사실은 성령이 마리아에게 내려온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아들이 종의 형상을 온전히 그리고 완전하게 취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태아의 생존이 가능한 일정 기간을 지났을 때에 또는 태어난 이후에야 인간이 된 게 아님을 말해준다. 만약에 그랬다면, 그는 인간을 군주 같은 사람으로 높이고 인간을 아예 그의 삶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항상 인간의 몸을 가진 인격이었다. 그는 언제나 육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감히 마리아의 자궁에 있는 생명이 아직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 점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결코 만들어지지 않고 잉태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태내의 다른 모든 피조물도 자연스럽게 잉태되고 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만들어진다. 인간이 어떻게 낙태로 하나님이 태내에 이미 짜 맞추어 놓으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인간이 무효로 만들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태중의 태아를 다스릴 권한을 주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의 영으로 태중에서 생명을 만드신다. “태중에서 나를 만드신 이가 그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태중에서 우리를 빚으신 이가 없으셨느냐?”(욥 31:5). 잉태된 생명은 그것을 만든 이에게 속하며, 그는 항상 인간의 탄생이 생명의 연결로 이어지기를 원하신다.
아담이 하와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는 그 이름이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창 3:20). 그리고 여호와와 함께 그녀는 생명을 공동 창조한다(창 4:1). 하나님께서 생명을 만드시고, 하와는 태중에서 잉태된 생명을 낳는다.
나는 ‘Catholics for Choice’가 설득력 있는 논증을 펼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대신에 나는 그들의 논리가 죽음, 즉 죽음을 사용하여 인류를 노예로 만드는 자의 힘(히 2:14-15)이라고 생각한다. 마리아의 자궁에 있는 생명의 매트릭스, 즉 하늘보다 넓은 자궁은 그 자체로 생명 자체인 예수님을 품고 있다. 출산을 통해 그녀는 자신을 구했을 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구주를 낳았다.
‘Catholics for Choice’의 죽음 논리는 동정녀 탄생 교리를 반박한다. 하지만 동정녀 탄생은 낙태 논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이 되어 마리아의 자궁에서 결합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영원하신 아들이 마리아의 일시적으로 마리아를 통해 잉태된 자녀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육신이 아니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에 거하시는 매 순간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