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by Dmitriy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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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angler fish)의 못생김(ugliness)에 대해 신학적으로 서술하라.” 20년 전 담당교수가 박사학위(Ph.D) 종합시험에 출제한 여덟 문제 중 하나였다. 200여종에 달하는 아귓과 물고기들은 기괴하며 거대한 입과 흉측하게 생긴 얼굴 및 피부 탓에 한국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아귀도에 떨어진 탐욕스런 귀신’이라는 뜻의) ‘아귀’로 이름 붙여졌다. 이런 흉측한 창조물에 대해 신학적으로 논하라는 것은, 미학과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좋은 질문을 끄집어내 합리적 결론을 도달하는 능력을 보이라는 뜻이었다.

문제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지식의 섬세한 디자인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 못생긴 것을 창조하신 이유, 즉 악의 문제와 연결되는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보편적이며 신학적 사유의 과정을 보여주었고, 유난히 징그러운 피부결과 현대예술을 떠올리게 하는 혐오스러움은 현대 미술의 리얼리티 표현에 빗대어 설명했다. 그 길었던 답안지의 중요했던 결론은, 아귀가 심해에서 초롱불을 달고 사냥을 하는 탁월한 기능, 혐오스런 색깔과 모양의 껍데기 속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부인할 수 없는 몸의 대칭과 비례 등을 들어 생명체의 ‘디자인적 요소’를 언급해 창조질서를 논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디자인하셨다. 한때 기독교에 맹렬한 공격을 가하던 무신론자 안토니 플루(Antony Flew)가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것은, 온 지구와 그 자연의 법칙이 ‘마치 누군가가 인간이 와서 살도록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There is a God: How the World’s Notorious Atheist Changed His Mind). 창조의 아름다움은 공허와 혼돈 속에 부여된 질서와 형태에서 시작했고, 그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본능대로 그가 주신 재료와 질서 안에서 새로운 디자인을 멈추지 않는다.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의상, 공업 제품, 건축 따위 실용적인 목적을 가진 조형 작품의 설계나 도안’이라는 사전적 정의는 부족하다. 나는 디자인을 ‘무질서에 질서와 형태를 부여해 기능을 돕고 강조하는 예술’이라고 정의해 본다. 라떼가 더 맛있어지는 하트무늬 거품아트처럼, 그저 떠돌아다니는 정보적 텍스트들을 자르고 재배열하고 강조해서 만든 한 장의 명확한 아웃라인처럼, 어둠을 밝혀 줄 뿐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노란 조명등처럼, 디자인이란 본연의 기능을 부각시키는 조화와 질서를 찾고 그 과정에 미적 요소 한 스푼을 얹는 것이다.

지난 달 60여 개의 크리스천 디자인 브랜드가 참여하는 마켓플레이스(레디컬 페스티벌)에 다녀왔다. 디자인으로 복음적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다양한 브랜드의 제품들을 구경하고 구매도 하며 많은 질문들을 품고 돌아왔다. 생각의 씨앗은 언제나 그렇듯 빠르게 자라간다. 크리스천 디자인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디자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로 그 관심이 옮겨갔다. 주위에 인테리어, 익스테리어, 웹디자인, 산업디자인, 패션 디자인 등, 직업적으로 디자인을 해야 하는 많은 동료들이 유독 빛나게 보였고, 최근 좋은 대화들을 통해 그들의 고민을 접할 수 있었다. 그들의 공통적 바람은 이렇다.

디자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다.
나만의 창조적인 디자인을 하고 싶다.
대중의 눈길을 끄는 디자인을 하고 싶다.
디자인으로 생계를 꾸릴 돈을 벌고 싶다.

즉, 하나같이 탁월하며 대체 불가능한 그리스도인 디자이너가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런 동기는 너무 추상적인 출발점이다. 그런 생각만으로 열심을 내는 것은 대중과 시장에서 공감을 받는 작품이 나오는 것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거나, 디자인 업계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작품의 구별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 갈등이 끊이지 못한다. 따라서 이 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그리스도인 디자이너들에게 중요한 두 가지 성경신학적 가르침을 소개하려 함이다.
 

  1. 디자인 본연의 즐거움을 꾸준히 맛보라

디자인의 기초는 창조세계의 조화로움에서 시작한다. 고대 피타고라스인들은 “질서와 비례가 아름답고 적합”한 것을 중요시 여겼고, 플라톤은 “정도와 비율의 유지”가 이름다움에 가장 중요하며, “정도의 부재는 추악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름다움은 규모와 질서 정연함으로 구성되어 있고, 아름다움의 주된 형태는 질서, 비례 및 명확성”라고 정의했으며, 스토아학파는 “부분과 상호간과 전체에 대한 비율”을 중시했다. 미국의 풀러신학교 문화신학자 윌리엄 더니스는 그들의 미적 기준이 우주적 질서를 반영하기 때문에 성경적 관점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즉, 창조된 세상은 완전은 그 질서, 대칭, 일치, 조화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창조된 질서와 조화로움을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에 디자인을 한다.

이 조화로움의 특징은 그 자체로 사람을 즐겁게 한다는 것에 있다. 창세기 2장에 에덴에 대한 설명은 창조에 대한 자세하고도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데, 창조의 질서 자체가 ‘기쁘고 즐거운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첫 번째 단서는 에덴동산의 어원이다. ‘에덴’의 어원은 ‘비옥한 평원’을 의미하며 히브리 단어 ‘기쁨’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동산’은 ‘잘 가꾸어진 정원’의 의미로 이는 하나님께서 섬세하고 특별하게 디자인하신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은 ‘기쁨의 정원’ ‘즐거움의 정원’ 또는 ‘낙원’을 의미한다. 두 번째 단서는 창세기 2:9로, “하나님이 그 땅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학자들의 시각을 빌려, “눈과 미각을 위한 즐거움의 조화” 즉 “사람들을 끌어당겨 즐거움을 주고, 그들 안의 기쁨과 경이를 깨우고, 창조를 향한 열망을 창조하게 하는” 모습이다. 즉, 하나님의 조화로운 창조물은 즐거움을 유발한다.

이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시편 89편을 설교하면서 “나무와 식물 그리고 꽃의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이 지구의 얼굴을 아름답게 꾸며 반짝거리는 것들로 박아주신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그 기쁨의 감정에 대해 강조한다. 그는 즐거움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것과 가장 관련 깊은 것임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디자인은 창조하심으로 기쁨을 얻는 창조주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과 관련이 있으며, 그가 심어 놓으신 본질적 즐거움을 맛보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 창조질서와 더 멀어진 듯하다. 오늘날 창의적 도안과 대중의 입맛의 사이에서의 전쟁 같은 고민은 하나님의 자녀로 일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시간조차 없다고 한다. 좋은 결과를 내야 하는 경쟁과 스트레스 속에 고단하며 지루한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 일은 기쁨보다는 슬픔에 가깝다는 말도 들린다. 손목과 어깨 등 다양한 통증과 동행해야 하는 것은 물론, 노력한 만큼 밥벌이를 하지 못할 때가 더 많다는 것이 현실이라는 말이 가장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진 최고의 소망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기뻐하신 조화와 질서를 재창조한다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디자인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언제나 의식적으로 질서와 조화로움을 이뤄가는 즐거움을 꾸준히 맛보아야 한다. 언젠가 누군가는 나의 작업을 대하고 즐거울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 중 사랑할 만한 포인트를 찾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부분을 찾아 즐거움을 누리는 것, 그것이 그의 자녀의 특권 아닐까? 성과의 걱정 없이 디자인의 본질을 향유하며 즐거워하는 자에게 끝끝내 좋은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지 않을까? 잊지 말자. 우리는 최초의 디자이너이자 기쁨 그 자체이신 하나님으로 시작한다.
 

  1. 디자인 속에 영원의 가치를 담아라.

디자인된 사물과 공간은 사람을 즉각적으로 변화시킨다. 즉각적 변화로 인한 도파민을 경험한 사람은 그 번개 같은 보상의 쾌락을 잊지 못하고, 불행히도 일상에서의 기다림 속에 주어지는 작은 기쁨들에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디자인 업계의 생태계는 언제나 유행에 민감하며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프란체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예수회 신부이기도 했던 미셸 드 세르토 신부의 사상을 인용하며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는 원칙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보이는 것을 우선시하는 것은 ‘자신을 내세우는 권력의 공간들을 독점하려는 것’과 관계가 깊다고 보았다. 즉, 이는 ‘모든 것을 현재에 가두어 두려고 하는 무모한 시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반면 그는 시간을 우선시하고 중요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비록 시간은 우리를 천천히 변화시키지만 시간만이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밝혀 주기 때문이다.

사물과 공간 안에 빠짐없이 가두어 두려는 우리의 모든 욕심의 습관 속에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시간의 신비함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기다림과 인내만이 시간을 잘 이해하는 길일까? 즉각적인 성과에 집착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천천히 확실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크로노스(흘러가는 절대적 시간)의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하늘이 허락한 특별한 기회의 한 순간)의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현실의 힘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독의 시간’이다. 2001년 부활절 연휴 기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소매치기꾼들에게 배낭을 잃은 직후 도착한 로마에서의 여행이 떠오른다. 아름다운 트레비 분수도, 성 베드로 성당의 그 찬란함도, 콜로세움의 그 고풍스러움도, 멀쩡한 눈으로 자세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마음은 그저 거칠고 사납게 대하고 있었다. 그렇게 여덟 시간을 걷고 민박집에 돌아와 불을 끄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을 때야 비로소, 온갖 짜증에서 벗어나 그 아름다움을 되새길 수 있었다. 그 밤은 때로 우리가 그곳을 떠나야 그 자리의 아름다움을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모멘텀이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오히려 실상을 벗어날 때 더 잘 보일 때가 있다. 왜냐하면 좋은 것을 누리는 즐거움은 여유롭고 따뜻하며 평안한 마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대개 고독의 시간에서 피어난다.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 영원이 투영되고 있는 지금의 순간을 인식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을 알아보는 진정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매일의 눈앞에 나타나는 일들 속에 비교와 욕심과 교만에 사로잡힌 상태에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만날 수 없으며, 영원이 연결되지 않은 모든 시간들은 내면의 일렁이는 불안과 욕구를 잠재울 길이 없다. 고독만이 영원과 이어지는 시간이다.

따라서 고독의 시간으로 떠나는 것이 그리스도인 디자이너의 가장 중요한 숙제가 되어야 한다. 당신의 디자인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넣고 싶은가? 누군가를 즐겁게 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디자인을 하고 싶은가? 내적 공허함이 조화의 기쁨으로, 길을 잃고 헤매던 가슴 속 황량함이 단순하며 절제된 만족으로, 당장 눈앞의 일들에 대한 긴장과 스트레스가 고요한 여유로 인도하는 디자인을 하고 싶은가? 고독 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소통하라.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대화로 때로는 찬양으로, 영원의 지금을 반드시 느껴보라.

디자인은 사람의 욕구가 아닌 고독을 이해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고독을 공감하는 일이다. 누군가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은 헤어진 후 홀로 있을 때 더 진해지며, 모든 사랑은 고독에서 시작한다. 디자인의 모든 과정에 누군가를 공감하고 돕고자 하는 깊은 묵상과 기도는 가치 있는 선한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겠는가? 당신의 디자인에 즐거움과 영원의 가치가 심기기를 바라며,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