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by Arivle On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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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겅퀴와 가시덤불
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 

40대 직장인입니다. 요즘 소위 MZ 세대들은 직장에서 일하는 방식이 우리 세대와는 다릅니다. 이들에게는 자기들의 시간과 자율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무리 회사가 바빠도 퇴근 시간이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냥 퇴근하는 것은 당연하고, 회식으로 자기들의 시간을 뺏기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한편으로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닌가 싶네요. 요즘 일터 사역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그리스도인 MZ 세대들에게 일터에서의 소명을 심어줘야 할 겁니다. 그런데 개인주의와 자유, 그리고 워라벨을 중시하는 젊은이들의 문화와 일터에서의 소명이라는 말은 잘 안 어울릴 것 같습니다.


김선일: 이 문제제기를 하신 분은 40대 직장인입니다. 아무래도 기성세대는 일터에서 열심히 일해서 좋은 성과를 올리는 것을 중요하게 봤고, 그 연장선상에서 기독교적 일터 소명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금주: 저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분은 같이 일하는 MZ 세대 직장인들이 더 많이 일하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인가요?

김: 종종 비슷한 하소연을 듣긴 합니다. 제 또래 중에서도 같이 일하는 젊은이들이 ‘칼 퇴근’하는 것을 보면서 물론 당연한 권리로 보면서도 약간 허탈한 느낌을 비추는 것을 보았어요. 우리가 소명이라는 말을 쓸 때는 거기에 뭔가 성실하고 정직하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엄숙주의가 있어서가 아닌가 싶어요. 자유를 누리면서 소명을 행할 수 있겠는가? 뭐 그런 의구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그런 건 전혀 걱정하지 말고 상관할 필요 없다고 봅니다. 젊은이들이 회사규칙을 어기지 않는 한 문제가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21장의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 베드로가 앞으로 순교할 것임을 암시하시자, 베드로는 그러면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 묻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요 21:22) 하십니다.

김: 젊은 세대가 어떤 식으로 일을 하고, 얼마나 휴일을 사용하든 간에, 그것이 법적으로 보장하고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 한 전적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기성세대 입장에서 자신들과 다르게 일하는 태도를 낯설어하는 것 같습니다.

이: 먼저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의 일하는 방식이 자신의 기대와 안 맞는다고 부정적으로 보기에 앞서 그들의 생각과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사자인 기성세대 분들도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과거와 같이 밤낮없이 열심히 일만 하고 시간을 바쳐서 승진하고 칭찬받는다고 합시다. 그러는 동안에 다른 삶은 어떻게 될까요? 가족과의 시간, 다른 사람을 섬기는 봉사,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같이 잘 될 수 있을까요? 자기 삶의 균형은 잘 이루어진 것일까요?

김: 일의 신학이 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일터 소명이라고 일에만 몰두해서 일의 성과를 내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은 조심해야겠네요.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라고 봅니다.

이: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해야 합니다. 일터와 경력만이 아닙니다. 나머지 모든 삶이 일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문제 제기를 하신 분이 일터소명이라는 말의 정의를 제대로 아는지 의문이 드네요.

김: 한국에서 일터 소명이라는 개념이 본격화되었을 때 그러한 생각이 많았습니다. 한 기독교 기업은 그곳에서 일하는 젊은 그리스도인 직장인들의 고강도 노동과 희생을 통해서 성과를 내었다는 것이 공공연히 알려졌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일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 일도 도와야 하는데 자기 일만 하고 쉬는 날 다 찾아 사용하면 이기적으로 보인 거죠.

이: 일의 신학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 자체가 소명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혼동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의 책임’과 ‘하나님의 소명’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일의 책임을 다해야 하나님께도 충실하고 상사에게도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9시부터 5시까지 끝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을 못 끝냈다면 어떻게 해서든 끝내야 합니다. 자기가 게을러서 못 끝냈다면 집에 가져가서라도 끝낸다는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시간 내에 책임 있게 일해서 끝냈다면 칼 퇴근을 하든, 휴일을 사용하든 당연히 지지해줘야 합니다.

김: 골로새서 3:23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말씀은 일터 사역에서도 자주 인용됩니다. 일터에서도 주님을 모시고 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우리는 정말 꾀 안 부리고 남들보다 더 많이 일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모든 일을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하는 것은 완벽하게 일한다는 의미보다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할지를 먼저 깊이 생각하라는 의미라고 봅니다. 젊은 세대의 경우도, 일터에서 세상의 일하는 문화를 추종할 것이 아니라 일터에서의 자세를 성경적으로 숙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터에서 리더의 자리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미국도 일터에서의 MZ 세대 논란이 거의 비슷하게 있습니다.

김: 사실 모든 조직을 개혁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지도자의 변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기성세대 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젊은 세대와 함께 일할 때 그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일터 문화에 관대하고 존중하는 대신, 그들의 은사와 소명에 충실하도록 도와준다면 조직의 문화에서 건강한 변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녁 회식은 요즘 MZ 세대가 가장 꺼려하는 일터 문화라고 합니다. 아무리 동료들과 친해도 저녁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자 개인 시간의 침해라고 보이니까요. 요즘은 MZ 세대가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개인의 자율성을 이해하는 존중하는 회식을 갖는 시도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자율 참석을 보장해줘야 하지만, 회식 일정과 메뉴를 젊은 세대와 상의하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결정권을 주는 방식이죠.

이: 이러한 문제들이 모두 일의 신학이 다루어야 할 주제들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제가 하는 일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어디 NGO에 가서 자원봉사를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결국은 직장에서 버티다 일찍 은퇴를 하고 신학을 공부하게 됐고, 일의 신학을 접하면서 비로소 일터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김: 일의 신학은 모든 삶의 영역에 대해서 제자리를 찾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군요. 예를 들어, 일의 신학을 연구하려면 휴식, 가정, 놀이 등을 같이 연구해야 하겠습니다. 일의 가치나 비중을 지나치게 격상시키는 것도 사실은 근대주의의 자아실현 노동관과 결합된 것이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 일의 신학 강의를 할 때, 중요하게 강조하는 도표가 있습니다. 일은 하나님 중심의 총체적 삶이라는 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앙에는 하나님 중심의 영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가족, 일터가 하나님 중심으로 원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맨 위에 있고, 교회가 그다음, 가족이나 일이 또 그다음을 차지하는 위계적 도표가 아닙니다.

김: 오늘 중요한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일의 소명은 단지 우리의 직업이나 직장에 몰두해서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일과 가정, 교회, 여가, 놀이 등이 균형을 이루어서 모든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에서 성과를 내고, 또는 일터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더라도, 가족을 소홀히 하거나 성도의 교제를 건너뛰고 주위의 약자를 섬기기를 게을리 한다면 그것은 일을 통해서 자기를 증명하려는 세속적 욕망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 안에서 자유하고, 다른 삶의 영역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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