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인천 옆에 있는 부천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살고 있는 집에서 이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신실하고 경건한 사람이었기에 이사할 장소와 집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항상 성경 말씀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특히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성경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후에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는 며칠 동안 금식과 기도를 반복하면서 성경을 통해, 이사할 장소를 최종 결정할 날을 기다렸습니다. 결국 그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최종 결정을 앞두고 그는 경건한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아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검정색 가죽으로 표지를 두르고, 책의 삼면을 금박으로 칠한 두툼한 성경책 위에 두 손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는 눈을 감고 단번에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그런 후에 눈을 뜨고 그의 눈에 처음 들어온 성경 구절을 읽었습니다.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사 65:21). 그는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포도나무가 있는 곳으로 이사하시길 원하시는구나.’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포도나무가 있는 지역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인지 알려달라고 기도한 후에, 다시 성경책을 펼쳤습니다.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왕상 17:3) 이 구절을 보는 순간, 그는 그가 이사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에 춘천 가는 기차를 타고 강촌이라는 동네로 MT를 자주 갔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리고 기차역 주변에 포도밭이 있었던 것이 기억났지요. 그는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동쪽에 있는 강촌 주변의 포도밭 옆으로 이사하길 원하신다는 것이지요. 이후에 그는 진짜 그리로 이사했습니다. 하지만 서울로 출퇴근을 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현실적인 이유로 성경 말씀을 통해 인도 받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게 되고 말았지요.
여러분에게 성경은 어떤 책인가요? 앞에 예로 든 사람은 성경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그에게 성경은 점치는 도구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가 보여준 결과는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상황에 따라서 바꿀 수 있는 가벼운 것으로 만들고 말았지요. 또한 그가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기독교 신앙을 상식에 어긋나거나 근거 없이 믿는 미신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혹시 우리에게도 성경을 읽으면서 이 사람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부분은 없을까요? 저는 우리 주변에서 세련된 모습으로 포장하였지만 이 사람과 다르지 않는 태도로 성경을 대하는 우리 모습을 종종 발견합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도 성경을 내가 원하고 기대하는 방향과 방법으로, 내 마음대로 이용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할 몇 가지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첫째, 성경은 전문 서적이 아닙니다. 서점에 가면 성경으로 보는 경영학, 과학, 경제학, 심리학, 교육학 등 다양한 전문적인 주제를 성경을 통해 설명하는 책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목만 보고 그 책들이 성경을 경영학이나 심리학, 과학 교과서처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이런 책들의 대부분은 일반 학문 속에 있는 잘못된 인본주의 세계관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내용이지, 성경을 그런 전문 서적으로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더러 이러한 주장을 하는 책들도 있고,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약 이천 년 전에 성경의 마지막 책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에 우리가 공부하는 대부분의 학문은 지금부터 백 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발견된 지식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이런 전문 지식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둘째, 성경은 자기 개발 서적이 아닙니다. 한때, 성공하려면 새벽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사람들 사이에서 설득력 있게 다가온 적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니 대부분이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업무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하려면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 후에 기독교 서점에는 새벽형 인간에 대한 책들이 줄지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성공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새벽형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신앙인의 바른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예수님도 새벽에 일어나셨다고 주장했지요. 그런데 성경에 새벽에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는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매일 그러셨다는 내용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새벽형 인간이 신앙의 표본이라면 전 세계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데, 저는 외국에 있으면서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좋은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가르치는 교회와 목사님을 본 일이 없습니다. 물론 새벽에 일어나 일찍 하루를 시작하면 좋은 점이 많지요. 그리고 하루를 기도와 묵상으로 시작하는 태도는 정말 좋은 습관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성경이 성공을 위한 규범이나 공식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성경을 잘못 읽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지요.
셋째, 성경은 도덕책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을 오해하시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성경이 인간다움의 기본이 되는 기준을 세우고 가르치고 있다는 점은 변치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성경이 도덕책이 아니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우리가 성경이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인간다움의 최소한의 규범과 도덕만을 가르치는 책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아니더라도 인간 사회의 많은 책들과 가르침은 인간됨의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도덕책이 아닌 이유는 인간됨의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만으로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도덕적 삶으로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성경을 단순히 도덕책으로 읽는다면, 그때 기독교는 다른 종교나 사상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종교다원주의라고 부릅니다. 도덕적인 선한 삶을 살면, 그가 어떤 종교를 믿든지 모두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성경은 미래를 점치는 책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 미래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성경을 일종의 미래를 예언한 암호문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암호문을 푸는 해독 열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이비와 이단의 교주들이 주장하는 것이 하나님이 성경의 비밀 암호를 풀 수 있는 해독 열쇠를 자기에게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이 성경을 바로 해독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수백 번 읽었다고 주장하지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실제로는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암호문을 해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인 해독의 열쇠를 통해 자신이 원하고 기대하는 내용으로 바꿉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마치 성경 말씀인 것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거짓 미래를 성경이 말하는 미래인 것처럼 만들어,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해 가스라이팅 하여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이지요.
다섯째, 성경은 QT를 위한 책이 아닙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매일 QT를 성실하게 하는 분들일 것입니다. 너무 잘하고 있다고 칭찬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QT를 열심히 하는 분들에게, 그리고 QT를 하려는 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성경을 여러분의 QT의 도구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당부하는 이유는 QT라는 도구와 의무가 성경을 읽는 좋은 동기로 작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QT의 도구로 만드는 경우를 자주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 때, 선교단체에서 ‘QT 선배’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후배들을 만나면, 항상 “QT 했니?” 하고 물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후배들이 저를 피해 다녔지요. 저를 보면 없는 죄책감도 생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저는 이 때문에 많이 후회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자유, 억압에서 자유, 배제에서 자유, 그리고 죄인을 환대하는 책이 성경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저의 QT에 대한 열심이 결국 성경을 오해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오늘도 QT를 하면서 성경을 펴는 이유가 누군가의 시선이 두렵거나, 하나님에게 꾸중 듣지 않기 위해 그런 분이 계신가요? 아니면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QT를 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기본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QT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아닌, 성경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그 자유의 복음에 집중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부끄럽지만 저의 흑역사를 하나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부터 QT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중학교 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포도밭 주변으로 이사한 사람처럼 여러 번 눈을 감고 성경을 펼쳐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 악한 의도나 어떤 숨은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는 열망이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누가 더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고, 더 나아가 성경이 너무 어렵게만 느껴져서 읽어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에게 누군가 성경을 잘 가르쳐 주고,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눈을 길러 주었다면, 아마 저는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이런 어리석은 행동에도 하나님은 저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지요. 혹시 저와 같은 어리석은 행동을 해보신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순수한 의도와 태도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선교단체의 사역자들도 이런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내버려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함께 성경을 읽고, 가르치고, 고민하며 나누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는 성경 읽기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