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by Adriano Gadini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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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소설 <아주 오래 된 농담>에 샤먼이 나옵니다. 부유한 집의 장남이 큰 병이 들자 ‘최도사’라는 샤먼을 초청합니다. ‘최도사’는 집터가 좋지 않으니 이사하라면서 아파트 위치와 층수까지 지정합니다. 그러나 원하는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최도사’는 자신의 영험한 능력에는 이상이 없는데 식구 중에 정성이 부족한 사람이 있어 좋지 않게 되었다며 빠져나갑니다.

언젠가 부유한 동네인 성북동 골목을 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 비싼 동네에 절집이 몇 군데 있는 걸 보고 의아했는데, <아주 오래된 농담>을 읽고서 이해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을 위한 전속 절집이겠지요. 재벌의 회장이 횡령죄를 짓고 감옥살이를 했는데, 점쟁이 말을 듣고 투자했다가 실패한 것으로 드러난 일이 있었습니다. 투자분석가의 건조한 자료와 수치만 믿고 움직이기에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었지요. 사업을 하는 사람 처지에서는 결정 한 번이 중요한데, 미래는 알 수 없고 환경은 수시로 변하니 무언가 영험한 권위에 의존하고 싶을 겁니다. 샤먼이 도처에 있는 이유입니다.

‘샤머니즘’은 한국 기독교에도 많이 퍼져 있습니다. ‘기도 받는다’는 말에서도 이 현상이 비쳐집니다. 교인들 사이에 퍼져 있는 이 말이 저로서는 참 이상합니다. 기도는 하는 것인데, 받다니요? 샤머니즘의 영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떤 영험한 자가 결정주고, 위로해 주고, 복 빌어 주어야 맘이 놓인다는 오랜 습관과 관념이 스며든 것이지요.

샤머니즘에 물든 ‘기도 받는다’는 말을 그리스도인이라면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이런 본문이 있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마 19:13). 주님은 분명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막 10:16). 그러나 이것은 흔히들 하는 ‘기도 받는다’는 말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으로 여겨 그들을 영접하고 축복한 것이지, 그들의 어떤 것을 결정해 주거나, 그들이 앞두고 있는 ‘수능시험’에서 ‘대박’ 나라고 기운을 불어 넣어 준 것은 아닙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기도하고 결정했다’는 말을 할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니 내 의견에 아무도 이견을 달지 말라’는 뜻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가운데 큰 확신이 들었다면, 그 사람은 오히려 더 크게 인내하면서 상대를 설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확신이라면 반대에 부딪혀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당성이 자신에게 있다면, 다른 의견을 두려워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데 기도 중에 확신했다는 사람들이 불통으로 나오는 건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는 것 외에 다른 일이 아닙니다. 맹목이 된 것이며, 언젠가는 큰 망신을 당할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샤먼의 기도와 다릅니다. 달라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