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ivity at Night, by Geertgen tot Sint Jans, c. 1490/Public Domain
Nativity at Night, by Geertgen tot Sint Jans, c. 1490/Public Domain

 

 

성탄절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을 12월 26일, 3년 만에 K-드라마의 새 역사를 쓴 《오징어 게임》이 시즌 2로 돌아온다. 《오징어 게임》은 여러 장르가 교차하는 한국형 장르 드라마로 불리지만, 그 형식과 내용은 판타지에 가깝다. 판타지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배경으로 한 가상의 이야기(픽션)를 말한다. 그러나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서 현실과 전혀 무관한 허구의 이야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판타지 장르는 오히려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곤 한다. 이는 판타지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는 ‘트릭’을 통해 관객이 자신의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끼게끔 착각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람들은 경계심 없이 스토리와 주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판타지가 지닌 이 독특한 특성은 장르적 매력을 넘어서, 중요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오징어 게임》은 이러한 판타지의 힘을 빌려 한국 사회가 직면한 고질적인 문제들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빈부 격차’ ‘능력 중심주의’ ‘과도한 경쟁 사회’ ‘천박한 자본주의’ ‘종교적 위선’ 등등, 우리 사회의 병폐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특히 아이들의 놀이인 ‘오징어 게임’을 드라마 전체의 구조로 차용함으로써 순수와 폭력, 놀이와 생존이라는 이질적 요소를 극명하게 대비시켰다. 비록 폭력성과 선정성 때문에 19세 이상 관람가로 분류되었지만, 이 작품의 인기는 세대를 넘어 초등학생과 청소년들까지 사로잡았다. 결국 어린이와 청소년도 관람할 수 있도록 편집된 버전이 따로 제작될 정도로 열풍을 일으켰다. 이러한 성공은 판타지 장르가 여전히 전 세대를 아우르며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사실, 판타지 장르의 강력한 힘을 먼저 알아차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은 그리스도인 작가들이었다. 현대에 와서도 이들의 작품은 영화와 드라마로 재탄생해 전 세계 수많은 어린이와 어른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왔으며, 초자연적인 세계와 기적을 꿈꾸게 만들었다. 판타지 장르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이들은 바로 《반지의 제왕》의 톨킨(J. R. R. Tolkien)과 《나르니아 연대기》의 루이스(C. S. Lewis)다. 톨킨과 루이스는 과학주의와 합리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판타지 소설을 통해 성경적 세계관과 성경이 가르치는 가치와 윤리를 독자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독자들은 이들의 작품을 통해 초자연적인 세계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잊고 살았던 신비와 초월의 감각을 되살릴 수 있었다. 그들은 판타지라는 장르를 활용해 독자들에게 초자연적 세계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하고, 인간 내면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신성(神性)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일깨웠던 것이다.

성탄을 맞이하며 이렇게 톨긴과 루이스의 이야기를 떠올린 이유는, 세상의 역사 가운데 가장 판타지 같은 사건이 바로 성탄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그것도 한 아기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은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초자연적이다. 이러한 성탄의 이야기는 오히려 십자가와 부활처럼 논쟁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마치 동화처럼 여겨졌다. 그래서인지 성탄의 사건은 진지한 대화의 주제라기보다 단순히 어린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치부되곤 했다. 루이스는 이러한 성탄의 성육신 사건을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기적(Grand Miracle)”이라 불렀다. 여기서 “위대한 기적”이란 단순히 가장 큰 기적이라는 의미를 넘어, 모든 기적의 근원이자 기원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나아가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초자연적 이야기의 원형이자 출발점이 바로 성탄의 기적이라 설명했다. 즉, 세상의 신화나 판타지들은 성탄의 이야기를 모방하거나 왜곡해 인간적 형태로 변형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성탄의 사건을 단순히 신화나 허구로 격하시키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픽션과 판타지가 성탄이라는 믿기 어려운 초자연적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음을 시사한다. 그 원형은 성탄이고, 나머지는 이를 뒤틀고 축소시킨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루이스와 톨킨이 창조한 판타지는 이 위대한 기적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예컨대, 12월 25일의 성탄이라는 위대한 기적보다 12월 26일에 공개될 《오징어 게임 시즌 2》에 더 큰 이목이 쏠리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오징어 게임》과 같은 이야기는 분명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지만, 결국 왜곡된 판타지일 뿐이다. 우리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해 봐야 한다. 성탄이 《오징어 게임》과 같은 이야기들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톨킨, 루이스, 체스터턴(G. K. Chesterton), 세이어스(Dorothy L. Sayers)처럼, 20세기 중반에 판타지라는 장르로 세상을 복음으로 이끈 작가들이 있었다. 그들이 판타지를 통해 사람들이 초자연적인 세계와 기독교적 진리에 눈뜨게 했듯이, 21세기 한국에서도 이들의 뒤를 이어 가장 위대한 기적인 성탄을 바라 볼 수 있도록 하는 기독교 작가들의 등장을 소망한다. 이러한 드라마와 소설을 지하철과 버스와 카페에서 머무는 사람들이 보는 글과 영상에서 다시 읽고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