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들고서 해를 넘긴 것만도 족히 마흔 번은 넘으니 이제 제법 상투적인 일이 되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이맘때는 무언가 특별한 의식을 치러야 할 것만 같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마음이 있다. 인간의 오랜 전통은 이런 마음을 적절히 표현할 수 있는 길들을 마련해 주는데, 자기만의 의식이라는 것도 좋지만, 어쩐지 여러 사람이 오랫동안 이어온 일을 하면 더 의미가 실리는 것 같은, 역시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생각도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섣달그믐날 일찍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속설을 핑계로 어릴 때부터 한 해의 마지막 날은 자정이 넘도록 잠을 자지 않았다. 새해는 주로 서울의 큰이모집에서 맞이했는데, 그날만큼은 어른들도 아이들더러 빨리 자라고 하지 않았기에, 떳떳하게 텔레비전을 보면서 놀다가 보신각종을 치는 그 순간까지 다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크리스마스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가시게 빨리 자야 했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는 반대로 늦게까지 자지 않아야 했던 이 의식의 변주는 아이에게도 연말 시즌을 제법 텐션 높게 지내게 하는, 한 해 중 가장 신나는 때가 되었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는 이 의식에 일기를 쓰는 의식이 더해졌다. 한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계획하면서 12시 땡 치자마자 첫 장에 1월 1일을 쓸 때는, 새해에는 이전 해보다 더 잘살아보겠다는 다짐과 함께 정말 더 잘살 것만 같은 은근한 기대로 희망과 비장함이 교차했다. 돌이켜보니 어릴 때부터 참 열심히 살았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건 천성이었을까 습관이었을까. 아마도 어느 정도의 천성에 습관이 더해서 강화되었을 것이다.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알차게 쓰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잠을 자라는 것이 아버지의 신조였다. 덕분에 나는 아주 오래도록, 깨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짜임새 있게 하루를 쓰지 않은 날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성취감이 느껴지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번 마음을 먹거나 정한 일을 해내지 않으면 찝찝할 뿐 아니라 패배감마저 들었고, 하겠다고 말한 일을 말한 때에 하지 못하거나 미루게 되었을 때 그 사정을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구차하게 여겼다. 그래서 웬만하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애를 썼다. 프리랜서로 오랜 세월을 살면서 직장인 못지않게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성격에 크게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박사 학위 코스워크를 마치고 박사 시험을 준비하고 논문을 쓸 때도, 이제 정기적인 수업이 없으니 앞으로의 시간 관리를 위해서 글쓰기 센터(writing center)에 등록을 하거나, 몇 명이 같이 서로를 체크해 주는 모임을 만드는 게 좋다는 조언을 들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나는 내가 끝내기를 원하는 시간에서 역순으로 계산해서 언제까지 무엇 무엇을 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그 계획대로 이행했다. 예를 들어, 박사 시험을 볼 때는 하루에 책 한 권을 본다는 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매일 하루에 한 권씩을 땠다. 논문을 쓸 때는 매일 최소 두 페이지를 쓰면 한 달이면 예순 페이지를 쓴다는 계산으로 조금 여유 있게 목표를 잡았는데, 결국 매일 다섯 페이지를 썼고, 일 년 만에 다 쓰고 졸업을 했다.
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도 이러한 하이 텐션의 삶은 이어졌다. 졸업하고 약 6년간 논문 열두 편에 단독 저작 세 권, 공동 저작 두 권, 연재 글 몇 십 편을 쓰고, 번역도 한 일곱 권은 한 것 같다. 작년부터 한 달에 한번 줌미팅으로 만나 서로의 글쓰기 근황을 살피는 미국인 동료들은 이런 나를 거의 슈퍼맨급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목표로 세운 페이지 수는 채우고 글을 써내는 나를 좀 급이 다른 사람으로 보았던 것 같은데, 최근에 이 신화가 깨지면서 그들이 그렇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렇다, 신화가 깨졌다. 쓰고자만 하면 무한히 쓸 수 있을 것 같았던 글이 써지지 않았고,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없게 몸이 아팠다. 뇌암에 걸리신 어머니를 챙기면서도 틈틈이 글을 쓰고, 얼마 전 뇌경색이 온 아버지를 돌보면서도 처음 한두 주는 다만 몇 자라도 적을 수 있었다. 아마도 그때 나는 필사적이었던 것 같다. 어떻게든 내가 하기로 한 일, 하겠다고 한 일을 해내야만 한다는 그 생각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혹 에너지가 달리는 일은 있어도 의욕만큼은 달리지 않았던 나는 어쩌면 생애 최초로 번아웃이라는 것을 맞이했는지도 모른다. 출근만 겨우 하고 주말이면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넷플릭스 보다 하늘을 보다 하면서 멍을 때렸다. 그렇게 네 번의 주말을 보냈다.
첫 주말에는 하늘을 보며 안식을 생각했다. 금요일 저녁 해가 질 때 시작해서 다음날 해가 질 때 끝이 나는 유대인의 절기가 기독교로 넘어 와서 주일이 되었지만, 기독교인에게 주일은 교회일로 바쁜 날이라 사실 안식과는 거리가 멀다. 안식일에 어느 정도 이상의 노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자잘한 규정들을 예수님이 깬 것이 기독교인에게는 의기양양한 일이 되었으나, 과로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규율로라도 쉬게 하는 것이 오히려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움직이기 힘들어 계속 누워있게 되니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자연적으로 음식을 적게 먹게 되었고, 안식일에는 음식 장만도 하지 않는 것이 참 말이 된다 싶었다. 불을 끈 채로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창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안식일 규정에 따라 이대로 불을 켜지 않고 하룻밤이 지나간다면 스크린타임으로 혹사당하는 나의 눈이 쉬겠구나 했다.
현대인들에게 이런 시간이 쉽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 고요함 가운데 마주하게 되는 자기 자신의 면면들 때문일 것이다. 이불 쓰고 하이킥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런 시간에 유독 잘 떠오르는 흑역사를 떨치기 위해서도 이런저런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손에 쥐고 놓지 못하게 된다. 혼자 여행을 가서도 부지런히 블로그를 쓰고 페이스북에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글을 올리며 다른 이들의 반응을 확인할 만큼 현대인은 그 어느 때보다 외로우면서도 사실은 제대로 외로울 시간이 없다. 고독(solitude)은 왠지 폼 나는 것 같은데, 외롭다는 것은 고독 상태를 잘 감내하지 못한다는 것이니 어쩐지 약점 잡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고독에 수반되는 외로움의 감정을 잘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도 활동이 제약된 안식일이 주는 유익이다.
딱히 경건하게 보냈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늘어져 있는 주말이 쌓이면서 절대 놓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끈이 조금 느슨해졌다. 장녀로서 내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일들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게 되었다. 가족의 신화에 매여 과도한 짐을 지려 했던 모습도 내려놓고, 나를 옥죄던 데드라인들도 일을 끝내야만 하는 날이 아니라 내가 끝내는 그날이 데드라인이지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사람이 갑자기 달라지면 죽는다고 하니 완전 딴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고(아직은 죽고 싶지 않으니까), 사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게 인간이지만, 네 번의 주말이 끝나갈 무렵 나는 ‘레릿고(let it go), 레릿고’ 하고 흥얼거리며 조금씩 기운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처음부터 몇 주인지를 세었던 것은 아니고, 돌이켜보니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있었다. 그런데 4주라는 숫자 때문인지 대림절의 4주를 미리 보낸 느낌도 든다. 이제 곧 대림절 3주차. 지금 책상에는 며칠 전에서야 겨우 꺼낼 수 있었던 크리스마스카드가 쌓여 있다.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한두 줄이라도 써서 보내려 한다. 그리고 새해에는 너무 열심히 살지 말자고 다짐한다. 인류를 위해 다 이루고 가실 그분이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의 위업에 딱 숟가락 하나 얹을 정도의 일만 하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