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 by Gerd Altman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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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등학교 때, 학년말이 되어 성적표를 받을 때가 되면, 아무개는 ‘수’를 다섯 개 받았는데 너는 ‘수’를 몇 개 받았냐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물었다. 중학생이 되니, 학년에서 몇 등을 하냐고 물어 왔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어느 고등학교는 대학을 몇명 보냈는데 네가 다니는 학교는 몇 명이나 대학에 들어가는지 물으며 궁금해 했다. 매년 생활 반경에 드는 학교들은 대학을 보낸 숫자로 비교되었고 ‘명문’이라는 명예, ‘똥통’이라는 오명의 세례를 받았다(내가 다녔던 모교는 선후배도 동년배들도 또 다른 학교 학생들도 “후진 학교”로 부르며 자타가 공인했지만, 교가만은 아니라고 우겨대던 슬픈 고등학교였다).

목사가 되고 난 후 흔히 받는 질문이 있었다.

“목사 경력이 얼마나 됩니까?” “성도 수는 얼마나 돼요?”

묻는 사람의 의도는 대부분 내가 가진 능력의 무게를 재고 싶어서인 것 같다. 이런 류의 인터뷰형 질문을 받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무슨 대답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의껏 물음에 답하면, 행여나 속으로 염려하던 일들이 간혹 벌어진다. 나의 특징 없는 스펙을 들을 때 어떤 이들은 눈치챌 정도로 실망의 눈빛을 보인다. 심하면 노골적으로 흥미를 잃은 자세로 돌변하거나 성의 없는 태도를 숨기지 않는다. 앞에 있는 사람의 무게가 가벼워 상대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하고 비교당하며 살아간다. 이로 인해 일시적인 여러 감정의 포로가 되기도 하고 평생 비교의 희생자로 남기도 한다.

2
시편의 백미는 23편이라 꼽을 수 있겠다. 그 보편성이 말해 준다. 교회 안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교회 밖의 사람들 중에도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니’로 시작하는 시구에 친숙함을 드러낸다. 그 만큼, 사람들 안에 기본적으로 내재된 정서와 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니, 구구절절 토를 달아 복잡한 주석을 하나 더 얹을 이유가 없을 것 같다. 시를 작게 분해하지 않더라도 그 실체를 투명하게 누구에게나 드러내 주고 있으니 말이다. 오히려 자세한 해석이 시의 생명력을 죽일 우려가 있지 않을까? 독자 각각의 해석과 감동만으로도 시의 가치는 더욱 확장할 것이라 믿는다.

시편 23편에는 평화, 안전, 자유, 풍요가 있다. 누구나 채워지기 바라는 삶에 꼭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다. 그런데도,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결핍되어 있는 이상적인 것들이기도 하다. ‘주님은 나의 목자 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시를 읊어 보지만 마음의 한구석에서 속삭이는 ‘부족함이 있다’는 소리를 그들은 떨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필연과 하나님의 통치를 믿는 성도들은 시에 그려진 완벽한 구도가 언젠가는 각자에게 실현될 현실로 바라보며 구절구절에 마음을 싣는다. 현재 어떠한 형편 아래 살든 상관없이 시에서 그린 이상은 장래에 현실이 되어 펼쳐질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결핍 가운데 있거나 만족을 누리고 있는 성도 모두가 ‘아멘’ 할 수 있는 것 같다.
 

시편 23

다윗 노래

 

1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2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시인의 말은 비교를 통해 얻어낸 상대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시인이 소유한 기준과 분량의 만족에서 나온 표현이다. 이는 단지 육신적인 필요가 채워진다고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목자와의 관계 속에서 공급되는 영적인 양식이 풍부하고 흘러 넘칠 때 할 수 있는 고백이다. 주님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발견한 사람이 갖는 느낌이며 고백이다.

헌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목자를 떠나 세상에서 만족을 찾으려 한다. 그곳에서는 양 스스로가 목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존재 의미를 자신이 찾고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자기를 소중하게 여기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며 자기의 가치를 높이라고 한다. 성공하여 다른 사람들이 나의 가치를 인정하게 하며 그것으로 나의 존재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부추긴다.

하지만, 가르침과는 달리 어떤 성취나 소유가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갖게 하고 넘치는 만족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잠시 아편처럼 그것들로 영혼의 허기를 잊을 수 있겠지만, 곧 찾아오는 목마름과 배고픔을 피할 수는 없다.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이룬다 해도 ‘부족하다’는 내면의 소리를 잠재울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목자를 삶에 초대하고 그분의 가르침과 인도에 따를 때만이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 비로소 영혼으로부터 나오게 될 것이다. 그분에 의해 나는 지어졌고, 그분 안에서만 나는 의미 있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이 나의 목적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항상 그분 안에 머물며 다시는 목마름과 배고픔과 시름하지 않고 영원한 행복 속에 살아갈 것이다.

3
비교는 한 나라의 왕은 물론이요 시골의 촌부도 가리지 않고 먹이감으로 삼는다. 권력을 가진 자는 다른 권력자와, 부를 가진 자는 더 큰 부를 가진 자와 , 미모를 가진 자는 더 미려한 부분을 가진 자와, 내 자식의 성공과 이웃 자식의 성공을 비교하게 해서, 자만, 시기, 우월, 혹은 열등감으로 인생에 상처를 내고, 평생 헤어나지 못하는 패배자로 만들어버리곤 한다.

성경 가운데 가장 불쌍한 비교의 희생자를 찾으라면 사울 왕을 꼽을 수 있겠다. 가련한 왕은 어느 시점부터 비교의 덫에 걸려 끝내 헤어나지 못하고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한다.

사울은 핸디캡을 가질 만한 이유가 없는, 많은 것을 가진 자였다. 비록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 가장 세력이 약했던 베냐민 사람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그리 얕볼 만한 가문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울 개인의 면모를 훑어보면 다른 사람들은 비교가 되지 않는 외모와 기량을 갖춘 특출한 인물이었다. 성경은 ‘이스라엘에 그보다 더 잘 생긴 사람이 없고, 키가 다른 사람보다 어깨만큼은 더 컸다’고 전해 준다(사무엘기상 9:2). 그야말로 군계일학이었다. 이에 더해, 한 나라를 다스리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의 자리에 있었다. 왕이 된 이래, 주변에 있던 이민족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며 백성의 신임을 얻은 명실상부한 왕이었다. 부러울 것이 없는 위치에서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으로 넉넉한 마음을 지니고 살 수 있는 복 받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인생은 큰 암초를 만나 좌초하게 된다. 인생의 절정기에 비교의 악몽이 그에게 찾아왔고, 이로 인해 그의 시간은 의미없이 소진되어 갔다. 떨치지 못한 비교의 망령이 그의 사고와 판단을 뒤틀어버렸고, 급기야는 인생을 통째로 삼키고 말았다.

그때까지는 사울은 다윗을 인정하고 사랑했다. 여인들의 노래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블레셋을 무찌르고 개선하는 사울을 위시한 이스라엘 군인들을 향해 여인들은 소구를 비롯한 악기들을 들고 노래하고 춤추고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했다. 이때 여인들이 부른 노래가 사울의 마음을 잠식해버렸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

사울의 전공에 비해 다윗의 전과를 월등한 것으로 노래하는 여인들의 비교는 사울의 시기심을 자극했고 그의 판단력마저 흐려 놓았다. 다윗을 왕위를 찬탈할 라이벌로 설정하고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마음에 이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성경은 그날 이후로 사울 왕은 다윗을 시기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사무엘상 18:9).

비교로 싹트기 시작한 시기심은 왕을 집착으로 내몰았고 그 집착의 결과는 자멸을 불러왔다. 걸출한 인물을 초라한 범부로 전락하게 하여 다 가진 자를 없는 자처럼 살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비교의 독성은 사람을 심한 열등감으로 마취하여 평생을 불행하게 만든다. 아니면, 자신에 대해 눈멀게 하고 교만의 늪에 빠뜨리기도 한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한 바리새파 사람은 자신의 우위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확보되었다고 믿는 자였다(누가복음 18:10-13). 어느 세리와 한 공간(성전)에서 기도할 때 그는 당당하게 서서 입을 연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의 마음을 높인 의로움이란, 모두,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이 멸시하던 부류의 사람들에 견주어 우위에 있다고 자부한 상대적인 것이었다. 그는 강도나 불의한 자, 간음하는 자와 같은 몹쓸 사람들과는 종류가 다른 사람이라고 기도의 머리에 자신의 도덕적 위치를 내세웠다. 이어, 실물을 들어 증명하듯, 먼 거리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자비를 호소하는 세리와 비교한다. 자신은 이 세리와는 더더욱 비교 안 되는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비유 속의 바리새인은 지독한 비교의 기재로 자신을 바라보고 타인을 평가했다. 종교인들의 전형적인 행태이다. 이 기재를 작동할 때 따르는 보상인 우월감과 교만은 그들에게 충분한 정신적인 양식이 된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드러나는 업적과 도덕성의 정도로 줄 세운 뒤, 컷오프를 하는 엄격한 심판관인 것이다. 그 커트라인이 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인 줄 모르면서, 그 선은 자신 아래에서 세리나 강도 같은 부정한 자들만을 가르고 있다고 착각하고 산다. 일찍이, 하나님의 기준에 미칠 의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알린 선조들의 가르침을 모른 채(시편 14:1-3; 53:1-3; 전도서 7:20).

다른 한편, 성경에는 비교를 모른 특별한 인물이 눈에 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살았을 뿐, 다른 사람의 어떠함에 동요되지 않았다. 자신이 이루어야 할 주어진 사명이 중요했지, 다른 사람의 가진 것 이룬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민수기에 기록된 한 에피소드는 모세의 특별함을 그려낸다. 모세 홀로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통솔하는 일은 크게 힘에 부치는 과업이었다. 무엇보다 줄곧 그에게 반항하고 불평을 해대는 ‘목이 뻣뻣한’ 그들을 감당하기 힘에 겨웠다. 자신을 죽여 곤경을 피하게 해달라고까지 할 정도였다(민수기 11:15). 급기야 하나님은 모세의 호소를 들으시고 그의 짐을 가볍게 해 주기 위해 조력자들을 붙여 주고자 하셨다. 그래서, 장로들 가운데 일흔 명의 지도자를 뽑아 회막에 세울 것을 지시하셨다(민수기 11:16-17). 그들에게도 모세에게 주신 영을 똑같이 부어 주어 백성을 돌보는 일을 맡기겠다고 하신다. 모세와 대등한 영적인 능력과 권위를 부여하시겠다는 뜻이었다.

모세는 말씀을 따라 70명의 명단을 만들었고, 그들을 회막에 세우니 약속대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린 영을 일흔 명의 장로들에게도 내려 주셨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장로들은 각각 예언하기 시작했다. 그들도 모세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사용하시는 지도자라는 증거가 나타난 것이다. 이때, 회막에 모인 장로들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가 진중에 머물던 두 명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났다. 명단에는 이름이 있었으나 회막으로 향하지 않았던 두 명에게 성령이 임하고 예언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민수기 11:24-30). 왜 그 두 사람이 회막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의 처소에서 다른 장로들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로 세움 받는 일은 일어났다.

이 놀라운 사건을 본 한 소년이 모세에게 달려와 알린다. 곁에는 젊었을 때부터 모세를 보필해 왔던 여호수아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 놀라운 소식은 여호수아의 충성심을 자극했다.

“어른께서는 이 일을 말리셔야 합니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이 사건이 조직의 권위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사건이자 존경하는 모세의 영적 위치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도전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한 사람 모세만이 보유해야 할 영적인 권위와 능력이 진중에 머물던 자격 없는 자들에게도 주어지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를 표명했다.

주군을 생각하는 신복 여호수아의 충언을 들은 모세는 말한다.

“네가 나를 두고 질투하느냐? 나는 오히려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 모두에게 그의 영을 주셔서, 그들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민수기 11:29)

모세는 먼저, 여호수아가 모세를 위해 다른 사람의 능력을 질투하는 마음을 가진 것을 지적한다. 예상치 못한 사건에 모세가 무슨 조치라도 취하길 바랐던 여호수아의 동기가 주인을 생각한 질투심에서 비롯되었음을 모세는 간파하고 다음말을 이어 갔다. 그가 가진 영적인 권위나 능력에 모든 백성이 도달했으면 좋겠다는 진심을 말한다. 사람들이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은사, 능력, 권세, 그 어떤 것에도 모세는 욕심이 없었다. 그것들로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독점하면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를 주장할 수 있는 것들인데 자신만이 가져야 한다고 전혀 생각지 않았다. 모세는 다른 사람들이 크게 되거나 높아지는 것이 상대적으로 자신이 작게 되거나 낮아지게 된다는 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 안에는 그를 다른 사도들과 비교하며 사도권을 부정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는 무리와 끊임없는 긴장 관계에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 여러 곳에 산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생전에 부름 받고 따라 다니며 직접 예수님을 경험하여 사도의 권위를 부여 받은 열두 제자나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승천 후 개인적인 경험으로 예수님을 만나 이방인의 사도로 떠오른 바울이 그 사도적 권위의 진위를 의심받은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충분히 사도 바울은 이미 교회의 지도자들로 부각된 다른 사도들의 관록과 자신의 일천한 기독교 초기의 경험을 비교하여 열등의식을 가질 만한 위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다른 사도들과 비견하여 조금도 미흡하지 않다고 주장한다(고린도후서 11:5). 하나님께서 그를 사도로 세우셨으니 다른 어떤 사람의 입증이 필요 없다고 믿었다(고린도후서3:1, 참고). 오히려, 예수님의 수제자라 일컬어지는 베드로가 사람들을 의식해서 올바르게 처신하지 않았을 때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는 등, 어디를 가나 조금도 위축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갈라디아서 2:11-14). 그가 열등감이나 비굴함 같은 비교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감정의 소유자였다면 교회의 대선배인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4

사람은 예외 없이 비교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타락한 본성은 비교의 기재를 물려받게 되었고 그 어떤 사람의 사고에나 작동한다. 불행하게도 어릴 때부터 정교하게 발전시켜 장착한 이 기재를 영구히 멈추게 할 능력을 가진 사람은 해 아래 없다. 심장이나 폐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비교의 기재 역시 사람의 능력 밖에 있는 그 무엇이다.

비교의 기재를 제거할 수 없으나, 다만 자신과 타인을 희생자로 만들지 않는 길을 찾고 실천할 수는 있다. 비교를 거친 불순물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빠르게 흘려 보내는 사고의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 장치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는 데서 형성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의해 구축되어진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비교를 통해 사람을 평가하고 등급을 정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로 비교의 부정적인 산물을 정화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모습과 성격이 각각 다르게 창조되었듯이, 한 명 한 명에게 부여하신 사명 역시 독특하고 다양하다. 이는 살아내야 할 인생의 길이 각각 다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비교를 통해 평가하시기로 하셨다면, 모든 사람을 똑같은 조건에서 출발시키셔야 하고, 동일한 환경에 놓으셔야 한다. 그런 뒤에 업적을 기대하셔야 공정한 분이 되실 것이다. 하지만, 어느 한 사람도 같은 조건에서 시작하도록 정하지 않으셨고 동일한 환경 속에 놓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달란트 비유의 가르침에서도 이와 관련한 하나님의 기대와 원리를 찾을 수 있다. 비유는 모든 사람은 창조주로부터 사명을 받은 유 목적적인 존재이며, 각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이나 분량이 다름을 보여 준다. 이 사명은 각 사람의 능력에 맞게 주어졌고, 나중에 있을 회계의 시간에 평가가 이루어진다. 각각에게 부여된 미션이 다르기 때문에 그날에 있을 평가의 준거 역시 다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양을 남겼느냐,  이 보다는 얼마나 받은 사명에 충실했는가를 따지는 시간이 될 것이다. ‘왜, 너는 저 사람만큼 남기지 못했느냐?’ 하는 질책을 받지 않을 것이다. ‘왜, 너는 저 사람처럼 살지 않았느냐?’ 하는 비교의 책망을 받을 것 같지도 않다. 대신, ‘왜, 주어진 것으로 너에게 기대했던 인생의 열매를 맺지 못했느냐?’ ‘왜, 너로서 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으로 살려 애썼느냐?’ 하는 안타까운 소리를 들어야 할지 모른다.

하나님은 비교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책망하신 까닭은 다른 종과 비교하여 수익을 덜 남겼기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 주어진 것과 주인의 기대를 하찮게 여기고 자신의 안전을 더 중하게 여긴 데 있다. 또, 주인은 다섯 달란트를 받고 다섯 달란트를 남겼던 종을 두 달란트 받아 두 달란트로 불린 종과 비교하여 차별화된 칭찬을 하시지도 않았다. 두 종이 받은 양과 남긴 것의 산술적 차이는 엄연히 존재했으나,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기대를 충족해 주었던 두 종에게 동일한 찬사가 내려진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마태복음 25:21, 22)

다음으로, 비교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 위해선 삶의 목표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늘 묻고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한다. 내가 가야 하는 길의 끝이 어디인지 알면 중간 과정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나를 비교의 지옥에 빠뜨리는 타인의 존재를 건너뛸 수 있다. 나에게 주어진 트랙을 벗어나지 않고 목표점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나아갈 때 다른 사람의 성과로 인해 일희일비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앞뒤를 재고 비교하고 옆길을 보며 나를 검열하지 않아도 된다. 비교를 통해 만족해 하거나 우쭐댈 이유가 없다. 뒤처졌다 생각하며 우울한 감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살아갈 이유도 없다.

사도 바울은 목표 지향적인 삶의 완전한 모범을 보여 준다. 그의 삶의 방식과 자세는 자신의 목표에 대한 강한 확신과 동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목표점에 다다른 후 그에게 인생을 부여하신 분이 기대하시는 사명을 성취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직시했지 옆을 보지 않았다. 다른 사도들과 비교하며 더 많은 업적을 만들고 명성을 얻기 위해 마음 쓴 흔적이 없다. 오직, 위에서 주신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위만 바라보고 달려갔다(사도행전 20:24, 디모데후서 4:7).

5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대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기독교 세계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그 안에 설치된 무대에서 성공하고 이름을 내고 싶어 한다. 그러다 보니, 끊임없이 곁눈질해야 하고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뤄도 나보다 많은 걸 이룬 사람을 이기려고 계속 달리고 달린다. 그 정도에서 멈추고 만족하는 법이 없다. 타인과 비교해서 나라는 존재가 평가되고 내가 이루어 낸 성과가 나를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허나, 그날에 하나님은 사람을 상대평가하여 인생을 결산하시거나 보상하시지 않는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비교의 늪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비교하여 의기양양하거나 의기소침할 일도 없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나의 목표점으로 바라보거나 배우고 따라야 할 길로 삼지도 않을 것이다. 대신,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과제가 무엇인지 찾고 그 목표점을 바라보며 매진하게 될 것이다. 

비교할 대상은 타인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나이고 예수님과 말씀이어야 한다. 이전의 내가 현재의 나로 여전히 머물러 있는지,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를 위해 얼마나 다가가고 있는지를 비교해야 한다. 간직해야 할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잃어버리고 그날에 타서 없어질 무가치한 것들로 나를 채우지나 않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내 안에 버려야 할 것을 버리고 단련하고 키워야 할 것에 힘써 왔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그때와 비교해서 성장했는지를 비교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도달해야 할 목표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더 이상 어린 아이로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서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라야 한다’며 예수님을 가리킨다(에베소서 4:14, 15). 그분의 인격을 닮아가고 행동방식을 실천하여 그분으로 나를 형상화해야 할 명제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목표점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 그려내고 간직한 예수님의 모습을 나의 현재와 비교하고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해 나와의 치열한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그럴 때, 23편에서 다윗이 영원히 살 것을 확신하고 염원했던 “주님의 집”이 내게도 가깝고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그 집은 업적이나 성과로 살 수 있는 집이 아니라 세상에서 예수님만을 집으로 여기고 살았던 사람들을 위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