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일터에서 겪는 문제와 질문을 두고 김선일 교수와 이금주 교수, 두 신학자가 대화하며 그 답을 찾아 나선다.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신앙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고 사업도 안정적으로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신학대학원을 다녔습니다. 원래는 목사가 될 생각이 없었지만, 신학을 공부하다 보니 목사 안수를 받아야겠다고 마음을 바꿨습니다. 신학대학원에 가기 전부터 회사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씩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가 되니까 직원들과의 관계에서 다소 불편한 점이 생겼습니다. 직원들도 저를 회사 오너이자 동시에 목사로서 대해야 하니, 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점점 제가 목사로서 자신들에게 관대하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목사이자 회사경영자라는 이중 정체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이금주: 이 분은 ‘일의 신학’을 공부하셨을까요? 저는 이 분의 질문에서 이중적 정체성으로 인한 혼란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경영자는 안수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하나님 앞에서는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일은 경영자나 종업원이나 다 같이 하나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선일: 예, 제가 아는 바로 일의 신학을 공부하시고 일터 사역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실제적으로 저런 고민을 하시는 그리스도인 경영자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 가장 중요한 점은 어느 직업을 갖고 있든 간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목사이든 아니든, 박사 학위를 받았든 안 받았든, 대통령이든 아니든, 남편이든 아빠든, 어떤 기능을 하더라도 한결 같은 소명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서는 목사의 기능이 있고, 박사의 기능도 있으며, 정치인의 기능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양한 기능을 맡을 수 있지만, 무엇을 하더라도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늘 동일한 과제입니다. 직장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김: 그 말씀을 하시니, 제 일 소명이라는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구체적인 일터나 직업에서 소명이 있지만, 그에 앞서 하나님의 사람이자, 예수님의 제자로서 정체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경우에는 회사 경영자로서의 기능, 목사로서의 기능이 혼재되면서 가장 우선적인 소명이 혼동되고 있다는 말씀 같습니다.
이: 이 문제는 일의 신학에서 다루는 가장 기본적인 주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삶에서 중심에 계시고, 그 주변에 다른 다양한 기능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 구도를 갖추면 경영자이든, 목사이든, 우리는 누구나 온전하고 일관된 인격으로 살아야 합니다. 김 교수님도 학교에서 교수로 가르치신다고 해서, 가정에서 남편과 아버지로 사는 것 때문에 이중 정체성으로 인한 갈등을 겪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김: 이중 정체성으로 인한 갈등보다는, 학교 강의나 연구로 바빠서 가족에게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겠죠(웃음).
이: 직장에서 예배드리는 것 자체가 일터 신학에서 소명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예배드리면 좋은 점이 많겠지만, 그게 의무감이나 죄책감으로 작동해서는 안 됩니다. 직장에서의 예배에 앞서 일 그 자체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각 개인이 직장에서든지 시장에서 판매를 하든지,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슨 뜻을 이루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김: 일의 신학이 일터 예배나 신우회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로 부름 받는 것이지 일터에서의 예배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저도 현재 일터 예배를 인도하지만, 그러한 예배조차도 일 자체가 하나님께 예배로 드려지기 위한 것이지요. 직장 내에서 종교 활동을 늘리는 것에 일의 신학적 방점이 찍히는 것은 교정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일터에서 예배를 드리면 직장과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힘든 직장생활 가운데 은혜와 위로를 누리는 유익이 있습니다.
이: 물론 그와 같은 유익이 클 것입니다. 질문하신 분도 경영자이시자 목사님이시라니까 오히려 자신의 사업체에서 다르게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라는 직분을 갖고 계시면 사람들에게 좀 더 인격적으로 다가갈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들에게 무슨 개인적인 문제가 있는지, 가족은 잘 지내는지 등을 묻고 대화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위로와 기도도 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김: 그게 장점이자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게 아닐까요? 목사이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교감을 할 수 있지만, 또한 경영자로서는 공적인 일을 하는데 개인적 인정을 자제해야 하니까요.
이: 그리스도인 경영자라 할지라도 회사의 경영 규칙은 분명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 대신 성경적 규범에 따른 일의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직원들이 더 늦게까지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일한 것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제때 주는 것도 그리스도인 경영자가 지켜야 할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김: 신명기 24:15을 보면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미루지 말라” 합니다.
이: 그 말씀에서 품삯을 당일에 주고 미루지 말라는 것은 일하는 시간을 지켜줘야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김: 본문에서는 일꾼이 가난하기 때문에 그 품삯을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일을 한 만큼 제때에 보상을 해주는 것은 그 사람의 일한 시간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도 성경에는 일터의 규칙에 반영해야 할 의미심장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신 22:8)는 말씀도 있는데,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통과된 중대 재해 처벌법도 이 가르침에서 해당되는 정신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 그리스도인 경영자는 하나님께서 함께 일하게 하신 이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일을 통해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책임을 일깨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따라서 일터에서 예배와 설교만 할 것이 아니라, 일터와 다른 모든 삶의 측면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하는 소명을 인식해야 합니다. 인간은 전인적인 존재입니다. 직장에서 시간을 뺏기고 가정을 소홀히 하게 한다면, 그러한 일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그것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사명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김: 히브리어에서 노동을 의미하는 ‘아바드’라는 단어는 섬기다, 예배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하죠. 우리가 일하는 것과 예배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일터에서 예배라는 시간을 따로 두는 것도 영적 유익이 있겠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일 자체가 일터에서 이웃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일의 신학을 배운 그리스도인 경영자라면 이처럼 더 깊은 소명으로 초대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 경영자라면 함께 일하는 분들이 자신들의 단점을 극복하고 은사를 잘 발견하고 일의 역량을 개발하도록 도와주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특히 신학도 공부하시고 안수도 받으셨다면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쉽게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비전 안에서 그들을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하나님 나라에 기여할 수 있도록 회복과 치유의 사명을 더욱 갖춰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으로서 종업원 각자가 맡은 일을 통하여 하나님 뜻을 이룬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김: 그리스도인 경영자에게 일의 신학이 가장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이 일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the Kingdom view of work)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겠죠. 하나님 나라, 이원론, 세계관과 같은 개념들은 그동안에도 자주 반복되어 왔는데도 실제 삶에서 중요한 원칙으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이 질문자가 말한 고민과 갈등은 이중적 정체성 때문입니다. 이를 극복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일터 신학의 선구자인 폴 스티븐스(Paul Stevens)는 한 강연에서 ‘어느 나라와 문화를 가 봐도 일터 소명을 실천하는데 가장 큰 문제가 이원론’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최근 Business As Mission이라는 개념이 유행하는데, 다소 불충분한 느낌을 줍니다. 비즈니스가 도구화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계속되는 이원론의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일의 신학은 Business “Is” Mission을 표방합니다. 비즈니스가 곧 사명이고, 궁극적 의미의 선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