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임윤찬의 쇼팽 콘체르토 연주를 직관하며 눈물겨울 만큼 행복했다. 손가락 끝에서 원하는 음색이 표현되었을 때 눈을 지그시 감고 살짝 미소 짓는 그의 표정, 모두가 한마음으로 숨죽이며 가슴 터질 듯한 환희를 내뿜는 공기, 나이 지긋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같은 호흡과 조화로운 사운드, 그 공간 속 행복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올 겨울은 유난히 행복을 위한 투쟁으로 분주하다. 이 땅에 가장 좋은 소식이 복음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크리스마스가 상징적인 기쁨의 날이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시국 논쟁에, 크리스마스에도 쉴 수 없는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삶들에, 새롭게 유행하는 문화를 따르는 것이 더 행복해 보이는 젊은이들의 풍경에, 유난히 씁쓸한 계절이다.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행복하기 위해서, 더 많은 경험과 변화를 추구하는 기독교 문화 속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행복이 무엇인지 묵상해 본다.

최근 함께 독서모임을 하는 청년들과 함께 관람한 영화 소방관은 이 주제에 어울리는 주제를 밀도 높게 담고 있다. 이 영화는 12월 4일 개봉한 곽경택 감독의 재난 영화로 2001년 서울 홍제동 상가 화재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지옥을 연상케 하는 화재 현장 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소방관들의 삶들을 엿보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인의 소명과 연결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함께 본 이들의 영화 감상평들 중 일부다.

  • 우리에게 부여된 ‘생명을 살릴’ 특권에 대해 생각했다.
  • 불길이 빠르게 번지는 것을 보며, ‘마라나타’의 긴박성을 생각했다.
  • 치솟는 불길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는 모습을 보며, 지옥이 저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향하고 있는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했다.
  • 자기 목숨과 가정의 희생을 바탕으로 잘 모르는 생명들을 구하는 이야기에 세상과 반대되는 가치관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 차라리 없는 나을 것 같은 잉여인간과 같은 방화범을 구하려고 소방관들 모두 희생한 것이 맞았나? 너무 비합리적이지 않은가? 생각했다. 인간의 등급을 나누거나, 인간의 가치를 매기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 성경에 ‘이웃을 사랑하라’ 말씀하신 것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라고 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
  • 망나니 한 명 때문에 희생당한 소방관들을 보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 결국 희생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먼저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하는데 당연한 것을 모두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확인하는 일을 매일 하지 않으면 당연히 세상 일들에 그리스도인으로의 진짜 정체성이 함몰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영화 관람 후 생명을 구하기 위한 복음의 전함, 용서함, 사랑함, 십자가 사랑을 본받는 희생과 죽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다. 집에 돌아오는 늦은 밤, 나와 이들이 공통으로 느꼈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대한 부담감’과 ‘이웃 사랑에 대한 막연한 의무감’에 대해 생각했다.

영화 속 소방관들은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대기하며, 늘 애를 태우며 말리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주저없이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 자기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구했다. 보통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불행한 삶을 사는 듯이 보였고, 그 삶을 멈추지 않는 그들이 미련해 보이기 딱 좋은 모습이 담겨 있었다. 자식과 부모를 뒤로하고 사랑하는 아내보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했던 그들의 사명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행복했을 것이다. 박봉에 냄새나는 숙소의 삶을 견디고, 쓰라리고 가려운 화상 상처를 매일 긁어가며, 가족의 핀잔과 원망을 듣는 일을 불행하다고 여길 틈이 없었을 것이다. 생명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맛보지 않고는 그 삶을 살 수 없다. 이 확신에 찬 나의 결론은 그 삶을 살았던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의 고백들이 든든한 뒷받침이 된다. 군중이 쓰나미처럼 우르르 몰려가며 추구하는 행복의 가치들을 배설물로 여겼던 사도 바울처럼, 그들은 더 큰 행복감을 맛보았던 것이 분명하다.

크리스마스의 계절,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는 당연한 전제 속에 있다. 당연한 나의 행복을 위해 나라가 안정되어야 하고, 개인의 경제 상황이 안정되어야 하고, 건강을 지켜야 하고, 외롭지 않아야 하고, 오늘 하루 남들에 뒤쳐지지 않게 발전해야 하며, 값진 성취를 위해 달려야 하고, 보기만 해도 감정이 상하는 사람을 내 주변에서 치워야 하며, 오늘의 눈부신 하루를 위해 기도하고, 내일의 고난이 제발 찾아오지 말라고 열심히 예배의 자리에 나간다.

개인적으로 이 계절이 오면 곧 오소서 임마누엘 (찬송가 104장)을 즐겨 듣고 부른다. 이 곡은 대강절을 위한 찬송으로, 12세기 로마가톨릭에서 사용되던 그레고리오 성가의 곡조에 가사를 붙인 중후하고 진지한 분위기의 캐럴이다. 깊은 어둠과 고통 가운데 메시아를 기다렸던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간절함이 선율과 잘 어우러지며, 오늘 이 시대에 부르는 우리는 그때의 간절함 위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또 다른 ‘간절함’을 덧입힐 수 있는 노래다. 그레고리안 제1선법에 의해 작곡되어 단조의 구슬픈 가락이 이어지지만, 유일하게 장조 화성으로 울리는 음을 가지고 있는 “기뻐하라”의 후렴구에 다다르면 성탄일의 행복감이 더더욱 최대화한다. 이 부분은 ‘행복한 크리스마스’에 대해 더 깊은 묵상을 하도록 이끄는 최고의 클라이막스가 아닐까 생각한다.

예수님의 탄생은 그런 행복이었다. 창조주의 겸손한 마구간 탄생은 둘째 치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고난과 슬픔으로의 선택을 표현할 인간의 언어가 없다고 확신한다. 삶을 산다는 것은 무척 고단한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틀어 철학자들은 삶을 괴로운 것이라고 단언했다. 삶은 허무하고(솔로몬, 잠언), 슬프며 (베르트랑 베르줄리), 고통 그 자체다(쇼펜하우어). 스토아 학파 선조들의 고결한 유산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가르침이었으며, 우울과 무기력은 자연주의에서 허무주의에 이르러 더 부각된 시대의 표상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와 같이 흙으로 만들어진 육신을 가지고 사셨다. 병들고 약하고 실패한 사람들 사이에서, 먼지와 냄새가 가득한 땅 위에서, 배신과 음모와 핍박과 고난을 이고 사셨다. 죄로 인해 갈 길을 잃어버린 군중 속에서 ‘피조물조차 한탄하고 울부짖는’(롬 8:2-22) 이 땅에 태어나 숨쉬었던 예수님 삶의 모든 순간을 깊이 묵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빌립보서(2:8)의 말씀은, 그의 삶이 우리의 망상과 착각속에 축소해 놓은 행복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예수님은 언제 행복하셨을까? 아마 예수님은 사람들이 회개로 하나님께 돌아올 때 기쁘셨을 것이다. 소망 없던 병에서 치유 받고 귀신에게서 놓임 받은 사람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며 구원의 길에 들어섰을 때 가장 즐거우셨을 것이다. 우매한 제자들과 사람들을 가르치며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이야기하실 때 희열을 느끼셨을 것이다. 틈만 나면 홀로 조용히 하늘의 아버지에게 기도할 장소를 찾아 기도하며, 소망으로 행복하셨을 것이다. 사람을 용서하며 사랑하며 가장 큰 쾌락을 맛보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흔아홉 명이 주님을 찬양해도 잃어버린 한 사람 때문에 사역도 기도도 쉬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아마도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을 영원히 살리는 일에 가장 행복하셨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임윤찬의 협연을 들으며 그토록 행복했던 이유는 연주자들을 포함해 그곳에 앉아 있는 2500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행복을 누렸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니 회중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공적 예배 중에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감동과 은혜를 누리는 이유도 ‘모두 함께’ 마음을 모아 같은 찬양을 하고 같은 말씀으로 하나되어 영광을 돌리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내가 아무리 개인의 성취를 이루고 자격을 획득해도 온전히 행복하지 못했던 이유는 늘 아픔 속에 돌보아야 했던 가정과 이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내 하루가 아무리 눈부시게 선물 같은 날이었을지라도 늘 그림자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디선가 시름하고 있는 나의 동료와 민족과 나라의 아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행복은 자신의 어떠함에 있지 않았다. 사도 바울의 기쁨은 자신이 감옥에서 멸시와 수난을 당하는 일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복음을 위해 살았던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은 자신의 처한 문제들에 함몰된 일이 없었다.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 4:9) 주위를 살피고 영혼을 불쌍히 여겼다. 이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 예수께 와서 얻는 쉼’(마 11:28)의 비밀이 아닐까? ‘그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워야’ 할 것은 진정한 행복의 맛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한 청년이 자신의 육촌 형제와 그 가정의 구원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부탁했다. 수첩 맨 위에 적힌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면, 그 생명의 소중함과 급박함을 이야기하는 그 청년의 눈빛에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따라오는 감정은 행복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행복은 이런 것이 아닐까 흐릿하나마 확인해 본다.

소방관 영화를 본 후, ‘생명을 살리는 사명자의 삶은 세상의 가치관과 다르기 때문에 매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우리의 다짐이 정말 행복하기를 기도했다. 예수님의 대위임령에 대한 의무감에서 벗어나, 진짜 그 길이 아니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음을 온 몸으로 느껴 가기를 기도했다. 나를 포함해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생명을 사랑하는 일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가기를 기도하며, Soli Deo glo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