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을 읽고 있는 60대 초반의 한 여선생님에게 어떤 책을 읽는지 물어 보았다. 그분은 책 제목 대신에 아직도 자기계발서를 읽는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남편은 ‘그 나이에도 그런 류의 책을 읽느냐’하며 나무란다고 덧붙였다.
작은 궁금증이 생겨서 왜 자기계발서를 읽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자,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는 대답과 함께 “선생님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나요?”라는 가벼운 반문이 돌아왔다. 당연히 ‘나를 사랑하지요’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건넨 질문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만 이상하게 들릴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난, 날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를 믿지도 않고요.”
“자기가 자기를 믿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으면 어떻게 해요?”
상식적이지 않은 생각이라는 듯, 충고인지 질문인지 모를 말을 흘리고, 그분은 때마침 그곳에 막 들어온 사람으로 대화의 대상을 옮겨갔다.
그럴 것이다. 통념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사랑하는 일은 당연하고 비난 받을 이유가 조금도 없는 긍정적인 태도라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반면, 자기를 사랑치 않는 사람은 자존감이 낮거나 정신적 결핍이 있는 부류로 취급하며 측은히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
통념 혹은 특정 신념을 떠나 자기를 어떻게 규정하고 대우하고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는 인생의 설계와 건축의 중요한 기초에 속하기 때문에 명확한 관점을 정립해야 필요가 있고 본다. 더욱이, 진리의 기초 위에 자신의 인생을 세워 나가고 싶어 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주제에 대한 선명한 해답이 제시되기를 기대한다고 믿는다. 그것도 삶의 표준으로 삼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2
다윗은 위대한 왕이자 겸손한 종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용사였지만 자기를 신뢰하기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으며, 현재의 높은 위치에 마음을 두기보다 과거의 낮은 신분에 마음을 두고 평생 살았다. 이런 남다른 태도는 하나님의 쓰임에 적합했고, 그 결과 걸출한 삶의 자취를 남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그가 완벽한 인생의 기록을 남긴 것은 아니다. 성경은 드물지만 중대한 그의 뼈아픈 실수를 건너뛰지 않는다. 그 중 밧세바와 관련한 간음과 살인 사건은 적잖은 분량으로 상세하게 언급하고 지나간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다윗이 가지 말아야 할 길로 기어코 가고야 만 것은 읽는 이들의 마음을 복잡하게 한다.
간음에서 멈출 수는 없었는지. 과연 사람이라는 존재는 스스로의 힘으로 의롭게 살 가능성이 있는지. 하나님은 그 때 왜 지켜보시기만 했는지. 다윗이 그랬는데, 더 취약한 우리는 과연 성도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지.
필시, 다윗은 그 정도에서 끝내고 싶었을 것이다. 즉, 전쟁 중 급히 부른 우리야가 밧세바와 동침하여 그녀의 뱃속에 생긴 생명의 원인이 되게 해서 거기서 일이 종결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사람 앞에 과오가 드러나지는 않을 뿐더러 충성스런 부하 우리야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헌데, 그에게 달려든 거대한 어둠의 힘은 기대를 끝내 꺾어 버렸고, 깊은 수렁으로 끌고 갔다. 이에 그의 체면과 명성이 타인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되어 마음을 점령했고, 마침내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악인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스캔들의 모든 뒤처리까지 비밀리에 마무리할 수 있었던 왕의 권력도 하나님의 눈을 가려 놓을 수는 없었다. 악의 시말은 고스란히 그분에 의해 관찰되었다. 그리고 상응하는 징벌과 함께 그 면모가 드러나고야 말았다.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체면과 명성은 나단의 고발을 시발점으로 아들 압살롬의 반란에 이르기까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시편 51편은 그 사건을 배경으로 지은 다윗의 시로 알려져 온다. 한 개인의 참회의 고백이지만 언제나 그와 같은 잘못을 범할 가능성을 가진 모두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경각심을 갖게 하는 힘을 가진 시인 것 같다. 이 작품에서 다윗은 그렇게도 보호하려 했던 자신이 얼마나 악한 자인지를 인정할 뿐 조금도 자기를 변호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모든 잘못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고 오로지 주님의 자비만을 구하고 있다.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정을 통한 뒤에, 예언자 나단이 그를 찾아왔을 때에 뉘우치고 지은 시
1하나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크신 긍휼을 베푸시어
내 반역죄를 없애 주십시오.
2내 죄악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내 죄를 깨끗이 없애 주십시오.
3나의 반역을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나를 고발합니다.
4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눈 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주님의 판결은 옳으시며
주님의 심판은 정당합니다.
5실로, 나는 죄 중에 태어났고,
어머니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죄인이었습니다.
6마음 속의 진실을
기뻐하시는 주님,
제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의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7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해주십시오.
내가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씻어 주십시오.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될 것입니다.
8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려주십시오.
주님께서 꺾으신 뼈들도,
기뻐하며 춤출 것입니다.
9주님의 눈을 내 죄에서 돌리시고,
내 모든 죄악을 없애 주십시오.
10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11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12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내게 자발적인 마음을 주십시오.
(13절이하 생략, 새번역)
‘하나님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Have mercy on me, O God)’로 시작하는 첫 절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곡가 그레고리오 알레그리의 폴리포니(다성부) 성가 ‘Miserere mei, Deus’의 제목이 되었다. 수난절 기간의 마지막에 성당에 선율이 되어 울려 퍼졌던 다윗의 고백은 사무치는 애절함으로 공명되어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흔한 말로 ‘곡조 있는 기도’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51편은 잘 다듬어진 모범적인 한 편의 기도문이다.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듯 시는 짜임새가 있다. 그 속에는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에 포함되어야 할 내용—범죄 사실의 솔직한 인정, 간절한 용서의 호소, 용서해 주시는 분을 향한 확신, 용서 받은 이후의 삶에 대한 결심—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시인은 절제된 감정으로 회개의 마음을 진실하게 드러내며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바탕으로 용서와 회복을 간구한다. 그는 자신을 한 치의 의로움도 지니지 못한 죄인으로 고백한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생명이 시작될 때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는 현재까지 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원초적 죄인임을 시인한다(5절).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베풀어지지 않는다면 버림받을 수밖에 없고 그분이 씻어 주지 않으면 깨끗해질 수 없다(1, 2, 7절). 죄인으로 태어난 그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살아갈 길은 오직 성령이 그의 안에 자리 잡고 삶을 주관하셔야 한다(11절).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셔야 한다(10절).
다행히,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죄를 지은 자를 거절치 않으며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베풀어진다. 주님은 잘 아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 의롭게 살 수 없고, 스스로 죄를 깨끗케 할 수 없음을. 그러므로 무력한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한 마음으로 그분께 나오는 사람을 반기신다(17절). 실패하고 넘어져 부서진 마음을 가지고 오더라도 온전한 제물로 여기시고 받으신다. 그 어떤 죄라도 해결해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을 귀하게 보시는 것이다.
3
나를 사랑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논하기 전에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성경에 기반한 관점을 세울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성경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을 찾지 못한다. 타인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여러 곳에서 명시적으로 강조되고 있는데 반해, 자기 사랑에 대한 말씀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서 명령하거나 권할 필요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가르치지 않아도 잘하기 때문인지 알지 못한다. 명확한 것은 성경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때 나타날 악한 현상을 여럿 열거할 때,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lovers of themselves, NIV)”라는 항목을 맨 앞에 세워 놓는다.
“그대는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그대는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디모데후서 3:1-5, 새번역)
종말의 때에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게 될 것에 대해, 마음의 타락, 무절제한 태도, 불경스러운 행위 등의 영적 도덕적 타락을 나열하는 선두에 위치시킨다. 그가 의도했건 안 했건 문맥상 강조되고 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일은 다른 도덕적 영적 잘못과 함께 주목할 악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다른 악한 행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현저한 잘못으로 지목하고 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자.
예수님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신 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 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를 잃거나 빼앗기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누가복음 9:23-26, 새번역)
십자가의 수난의 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전과는 다르게 비장한 말씀을 하신다. 마치 임박한 치열한 전투를 앞둔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결사의 정신을 고취하듯 그분의 말씀은 심각성을 띄고 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물론, 스승과 연루되었던 제자들에게도 삶과 죽음의 도전이 임박해 있었다. 말씀이 암시하듯 ‘목숨을 구하려 하느냐, 잃느냐’ 하는 중대한 결정의 기로에 설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잘 깨닫지 못했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몰랐을 뿐만 아니라 아마 오해했을 수도 있다. 그들이 기대하던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는데 따르는 진통이 기다리는 정도로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은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지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성경의 기자들은 전한다.
구하려 하면 잃고, 잃는 자는 얻는다는 역설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전제를 요구한다. 쉽게 말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는 못한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까지는 혹 이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대상을 위해 목숨을 내어 주기까지 자기를 던지지는 못할 것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고생과 고난의 길에 동참해왔다(누가복음 18:28). 그 동기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는 단순한 그것만은 아니었다. 예수님을 정점으로 하는 메시아 왕국이 도래할 때 우선권을 가진 자들에게 돌아올 영광을 꿈꾸고, 현재의 어려움을 견디어 내며, 마지막 예루살렘 길에 동행한 제자들도 있었다. 어쨌든, 그 어떤 동기였더라도 그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없었다. 자기라는 존재가 끝까지 붙잡아야 할 사랑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예수님은 제자들과 달리 끝까지 자기를 사랑치 않으시고 목숨을 버리셨다. 자기를 깨뜨려 세상에 오신 목적을 기필코 이루셨다. 자기 사랑을 일깨우던 사탄의 유혹을 광야에서 이기셨고, 처참한 죽음을 앞두고 시름하셨던 겟세마네에서 고뇌를 극복하시고, 극한 고초를 견디신 후, 말씀처럼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다.
‘예수님이 자기를 사랑하셨다면…’
우리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흔드는 가정이 아닐 수 없다.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버리신 고귀한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라는 존재는 영원히 버려진 채 다시는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분이 자기를 찢으셨기에 우리는 잃어버린 나를 얻게 되었다. 자기를 사랑해서는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없다는 진리를 몸소 보이신 것이다.
4
‘자기를 발등상으로 내려놓아야 한다.’ ‘자기를 사랑하면 안 된다.’ ‘자기를 미워해야 한다.’
한 동안 신앙의 배움의 길에 있을 때 초인처럼 보였던 목사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를 부인하고 오로지 주님만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분의 가르침은 성경 말씀으로 탄탄히 뒷받침 되었고, 스스로 당신은 없는 사람인 듯, 말한 바를 철저하게 실천하여 보이며 사셨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참 길을 걷고 싶어 했던 성도들은 그분이 제시하는 성도의 삶은 좁은 길이었지만 진리의 길이 되었다. 또, 그 길을 앞서 가는 목사님이야말로 모두가 따라야 목표로 자리 잡았다. 한 때, 나의 의식 역시 여기에 갇힌 나머지, 그분이 만든 틀 속에 나를 맞추기 위해 노력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신앙의 실천이 잘 안 되는 것은 아직 십자에 나의 자아를 처리하지 않은 탓으로 여기며 자책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은 여전히 나를 검열하고 때론 정죄하는 높은 준거가 되었고 ‘나를 사랑치 않는다’는 의식을 공고히 해왔다. 그리고, 때에 따라 이런 의식을 표현하도록 작용해 온 것 같다.
정말 그런 것일까? 신앙은 자기 부정의 토대 위에서만 계속 건축되어져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기를 사랑하면서도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성도의 삶은 가능한 것일까?
분명,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 속에는 선한 것이 없다. 그리고, 나의 옛 자아는 틈만 나면 여전히 나를 점령해서 주인 행세를 하려 한다. 내가 언제나 우선이고 나만을 위해 달라고 주장한다. 이런 나를 높은 곳에서 멀찍이 객관적으로 본다면 사랑할 만한 구석이 한 곳도 없을 것이 분명하다. 나의 포장을 걷어내면 이기심으로 뚤뚤 뭉친 욕심꾸러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할 가치가 없고 해서도 안 될 대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미워하고 방치하고 함부로 해야 할 대상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바라보는 관점에 필터를 끼워야 한다. 나를 죄의 시장에서 값 주고 사신 주인의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린도전서 7:23). 나라는 존재 자체가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분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할 것은 아니다. 헤아리지 못할 그분의 절대적인 사랑이 나에게 가치를 부여하셨다.
그분이 나를 가치 있게 하셨다고 나의 옛 자아가 가치를 갖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옛 자아는 아직도 완강하다. 여전히 그 자기 중심의 속물근성을 버리지 못한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때때로 주장하고, 예수님마저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듯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노래하기를 좋아한다.
착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의 가치와 자존감은 내가 사랑하고 나의 혈육과 친구가 사랑해 줄 때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나를 만드시고 나를 위해 희생하신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나의 진정한 주인에게 나를 양도할 때 그분 안에서 고양되고 튼튼해진다. 바로, 나는 내가 사랑할 대상이 아니라 주님이 사랑할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분의 사랑이 나의 자존감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온 우주의 주인이 나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믿기 힘든 사실이 나의 가치를 바로 볼 수 있게 하고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하늘나라의 상속자이며 그분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서 나를 자리매김할 수 있다.
5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취급해야 하는가?
살펴왔듯이 단순한 대답으로 깨끗하게 갈음할 성질의 질문은 아니다. 어느 정도 양면성을 가진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을 잘라 버리고 남은 한쪽만이 따라야 할 명제라고 주장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균형을 잃어버린 듯한 교회나 사회에 만연한 자기 사랑의 풍토를 중립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수는 없다.
나라는 존재는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치를 가진다고 여기면 좋겠다. 그분이 나를 가치 있게 여겨 주시는 것과 내가 나를 바라보는 것 사이에서 가치의 혼돈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살며, 때론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스도를 앞세워야 할 때 나의 가치를 주장하고 자존감을 표명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내 안에 살아 있는 육의 자아를 바라보는 눈은 냉철해야 한다.
나라는 문제아는 늘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고 고집을 부리기 때문에, 자랑, 시기, 불평, 교만 등 자기를 지키고 확대하는 데 능하다. 경계하지 않으면 나를 망치고, 타인을 곤경에 빠뜨리며, 주님의 이름에 손상을 주게 된다. 성령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으면 지독한 이기주의 본능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장 7-10절에서, 인정 없이 종을 부리는 주인처럼 오해 받을 수도 있는 비유로 말씀하신다. 들에서 종일 밭일을 하고 양을 치던 목자가 돌아왔을 때 주인은 그에게 수고했다는 칭찬 한마디 하지 않는다. 오히려, 녹초가 되었을 종에게 식사를 준비하라고 명령하고, 준비가 다되면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한다. 종에게 같이 먹자고 하기는커녕, 곁에 서서 시중을 들라고 한다. 물론, 이 비유는 당시 종을 부리는 부자들의 어느 집에나 있을 법한 장면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주종 관계에 빗대어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잊은 종처럼 자기를 버리고 주어진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곧,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는 태도로 일하라고 하셨다.
자기 사랑은 때로 기독교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반기독교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자기를 사랑해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비롯한 높은 수준의 기독교 정신을 세상에서 구현할 수 없다. 잘못하면 신앙은 나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하게 되고 하나님을 나의 수호신 정도로 대접할 수 있다.
자기애가 자기를 성장시키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자기를 사랑해선 자신은 물론 타인의 성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오로지 자신을 흉측한 괴물로 만들 뿐이다.
슬프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자기 사랑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자기에게 귀를 기울이고 자기를 먼저 바라보는 일에 마음을 떼야 한다. 다윗이 인생에 진한 오점을 만든 것은 자기에게 무게가 쏠려서 타인과 하나님을 경시했기 때문이다. 도리 없다. 자기를 순간순간 부인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기력하게 그 괴력에 끌려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수밖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