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의 긴장(tension)은 신학적·목회적 균형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긴장입니다. 그 긴장은 11년 전 교회개척 이후에 끊임없이 다양한 옷을 입고 찾아왔습니다. 인생과 교회의 계절에 맞춰 입을 수밖에 없었던 목사의 긴장들을 런웨이에 하나씩 올리는 마음으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개척을 준비하는 목회자와 이제 막 교회를 시작한 목회자들이 마주할 긴장과 고민을 염두에 두고 글을 씁니다. _글쓴이 박용주
목회의 길, 균형을 향한 긴장의 과정
목회는 ‘긴장(Tension)’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긴장은 모순(矛盾, Contradiction)과는 다릅니다. 목회 현장에서 직면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하나가 참이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거짓이 되는 식의 ‘배타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목회 현장의 문제는 단순한 흑백 논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황을 모순으로 바라보면 선택지는 더 좁아지고, 안팎의 갈등은 더욱 깊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오직 너는 크게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라.”(수 1:7; 신 5:32, 17:11, 17:20, 28:14) 사람의 기본값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좌와 우로 갈라지며, 모순의 세계로 치닫고 있습니다. 교회 또한 이러한 세계관에 갇혀 갈등과 분열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목회현장에서 진정한 긴장은 기계적으로 중립을 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목회의 긴장이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친 양들을 붙잡고 말씀이라는 줄을 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긴장은 외줄타기 하는 사람이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외줄을 타는 사람은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반대쪽으로 힘을 주고, 다시 반대쪽으로 기울어지면 균형을 맞추려 힘을 씁니다. 그는 끊임없이 부채나 긴 막대(지팡이)로 균형을 잡지만, 완전히 똑바로 선 상태로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의 길은 완벽한 균형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진리 위에 서려는 긴장의 과정입니다.
목회의 긴장은 단순한 갈등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적·목회적 균형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긴장입니다. 그 긴장이 개척 이후에 끊임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제게도 찾아왔습니다. 인생과 교회의 계절에 맞춰 입을 수밖에 없었던 목사의 긴장들을 런웨이(Runway)에 하나씩 올리는 마음으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개척을 준비하는 목회자와 이제 막 교회를 시작한 목회자 들이 마주할 긴장과 고민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능동성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의 긴장이 존재합니다. 먼저 인도하심의 능동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능동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빌 2:13) 하나님은 먼저 그의 뜻을 나타내신 후, 우리가 그 뜻을 원하고 기뻐하며 따르게 하십니다. 인도하심의 능동성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사역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능동성이 지나치면 하나님보다 앞서게 됩니다.
베드로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구속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막아섭니다(마 16:22, 23). 마지막 만찬에서도 그는 또 한번 선을 넘습니다. 주님은 그날 밤에 성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쓴 인생각본에는 배신이 없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눅 22:31, 34). 하지만 결국, 주님의 말씀대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맙니다.
세상은 우리의 진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대로 흘러갑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 16:9) 이것은 사람의 계획과 노력이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모든 계획과 노력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 아래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적극성 속에서도 우리가 지켜야 할 경계가 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사 55:8-9).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수동성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수동성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베드로를 찾아가십니다. 이 장면은 베드로의 인생 전반전의 삶과 그 결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보다 앞세울 때, 그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그의 인생 후반전에 대한 인도하심을 알려 주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요 21:18) 베드로의 인생 후반전은 수동적인 인도하심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원하지 않는 길로 밀려갔고,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이끌려갔습니다.
수동적인 인도하심은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와 동행할지 말지를 두고 다투었고, 결국 팀이 나뉘었습니다(행 15:36-41). 파괴적인 다툼이 과연 하나님의 수동적인 인도하심 안에 포함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다만, 저는 바울과 바나바 모두 이런 일을 계획하거나 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역시 수동적인 인도하심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동적인 인도하심의 또 다른 끝에는 외부의 핍박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박해를 피해 각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내부적 다툼과 외부적 핍박 사이에는 수많은 수동성이 존재합니다. 엘리야의 사례를 보겠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엄청난 기적과 사역을 감당한 후에 탈진에 빠졌습니다. 외부의 공격에 함께 맞설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런 말을 합니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왕상 19:4) 말하자면, 사표를 던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후 그의 사역은 엘리사에게로 이어집니다. 목회자의 우울증과 공황 증세도 수동적인 인도하심의 한 부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부르심을 따라 경험하는 수동성도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고전 3:6) 사역자가 한 지역교회에서 맡은 역할을 다하면,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사역자를 보내어 그 사역을 이어가게 하십니다.
목회 속 인도하심의 긴장: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능동성과 수동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성경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이 주제를 목회의 긴장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차례입니다. 한 개인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적극성과 수동성 사이의 긴장은 필연적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원 때문에 움직이는가? 아니면, 단지 생계가 힘들고 어려워서 떠나려 하는가? 주님의 뜻을 확신하기에 힘들어도 이곳에 머물려 하는가? 아니면, 편하고 안락하기 때문에 이곳에 머무르려 하는가?" 이 질문들에 답하는 것부터 쉽지 않습니다. 적극성 100퍼센트와 수동성 0퍼센트 상태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려 한다면, 거의 실패할 것입니다. “나는 지금 현실에 대해 하나도 불만이 없어. 오직 주님의 뜻 때문에 움직이는 거야.” 이 말은 멋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솔직함을 포기한 사람의 말일지도 모릅니다. 특히 여러분이 한 지역교회의 담임 목사라면,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적극성과 수동성을 더욱 예민하게 다뤄야 합니다. 목사와 교회 모두에게 큰 상처와 분열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저의 부끄러운 경험을 먼저 나누겠습니다. 2013년, 제가 출석하던 개척교회를 보며 “이런 교회를 개척하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교회 개척에 대한 마음이 점점 커졌습니다. 제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불이 아내에게도 옮겨 붙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매운 연기만 피어오를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아내는 개척에 동의했습니다. 아내가 동의한 이유는 이랬습니다. 셋째 출산을 위해 병원에 누워있던 아내에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개척할 지역의 지도를 들고 와서는 설명하기 시작한 겁니다. 출산의 고통 속에 있는 아내 앞에서, 저는 교회 개척의 비전에 불타 있었던 것이지요. 아내는 그 순간 “아, 개척을 하게 되었구나. 개척은 이미 결정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감사하게도 아내는 지금까지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저의 적극성이 산통을 겪는 아내에게 얼마나 무례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건 ‘처치 플랜팅 폭력(Church Planting Violence)’이라 부를 만하죠. 이처럼 매우 적극적인 개척자 부부 안에서도, 인도하심의 능동성과 수동성이 함께 갑니다. 누가 더 영적으로 성숙한지는 …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시겠죠.
2025년, 우리 부부는 다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개척 때부터 말했던 분립 개척의 비전을 이루며, 그 첫 번째 개척자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 결정은 2013년 첫 개척 때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이제는 아내만 설득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직분자와 온 교우의 마음이 하나로 모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놓인 모든 목회자가 바라는 최고의 인도하심은 무엇일까요? 온 교회가 안디옥 교회처럼 금식하며 기도하고, 성령의 지시에 따라 목회자를 지지하며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위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려 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뒤에,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 떠나보냈다.”(행 13:2-3) 정말 이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교인들이 능동적으로 목회자의 인도하심에 반응해 주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모든 목회자의 소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 사이에도 없었던 일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겠지요.
공동체 안에서의 인도하심: 긴장과 반응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공동체 안에서 받을 때, 목회자는 쉽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수 있습니다. 목사가 능동적인 인도하심을 강조하며 멋지게(?) 떠나면, 그를 사랑하는 일부 회중의 회중은 버림 받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새장가 드시네요. 우리와 결혼한 줄 알았는데.” 반대로, 목사가 수동적인 상황을 강조하면 교회가 분열될 위험이 커집니다. "목사님을 저렇게 힘들게 한 사람이 누구야? 목회자가 행복하게 사역해야 우리도 행복하지." 이렇게 생각하는 교인들은 본능적으로 목사를 힘들게 한 원인을 찾아내려고 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갈등과 분열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한편, 목사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능동성을 강조하면 이렇게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렇게 사역을 했는데, 환경을 바꾼다고 잘할 수 있을까요?" 반대로, 수동성을 강조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나는 것이 인생 아닌가요?” 회중 역시 좌로나 우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결국에 힘들어서 떠나는 거야. 만족하면 누가 나가겠어?” “우리를 버리고 떠나는 거야. 무책임한 목회자야.” 긴장을 놓친 이런 말들은 목회자에게 큰 두려움과 상처를 남깁니다.
공동체와 함께 인도하심을 받는 여정
이런 현실을 깊이 이해하는 이들은 목회자가 인도하심의 적극성만을 말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저는 남겨진 교회와 후임 목회자를 지키기 위한 이 사랑어린 조언에 깊이 공감합니다. 당연히, 단순히 이동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이유만 말하는 것은 결코 지지하지 않습니다. 농사를 망친 뒤에 논밭을 탓하며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더러워서 개척한다. 더 러워서 떠난다" 해도, 결국 어디를 가건 의인이 된 죄인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지역 교회의 목회자는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공동체와 함께 받을 수 있을까요? 회중은 목회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 설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먼저, 하나님이 적극성과 수동성을 모두 사용하여 목사와 교회를 인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목회자와 회중 모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모순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능동성, 적극성, 헌신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합니다. 세웠던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될 때 기뻐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보십시오(요한복음 21장). 젊은 베드로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수동성’과 ‘수용’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요 21:19) 가장 수동적인 죽음으로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린 예수 그리스도처럼, 베드로 또한 수동성을 수용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을 받았지만, 흩어진 곳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진 사건 역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래서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돌아다니며, 모든 교회를 튼튼하게 하였다.”(행 15:41) 또한, 엘리야의 사역이 끝난 후, 엘리사가 갑절의 은사를 받아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스승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을 제가 갑절로 받기를 바랍니다."(왕하 2:9)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는 복음은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수동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능동성과 수동성이 긴장 속에서 맞물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공동체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목회자와 교회는 어느 한쪽의 입장에 치우치지 않는 건강한 긴장 속에서 서로를 보호하며, 성령님의 지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 “교회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 이렇게 한쪽을 소외시키는 것은 결국 관계를 무너뜨리는 길입니다. 그러나 인도하심 안에서의 긴장은 신뢰와 헌신, 용서와 희생,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는 수용을 통해 목회자와 교회를 더욱 깊어지게 하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안디옥 교회: 인도하심의 춤을 배우는 공동체
사도행전 16장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능동성과 수동성의 긴장을 놓지 않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원래 소아시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기도하며 계획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성령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닫힌 상황이 단순한 장애물인지, 아니면 방향을 틀어야 할 표지판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수동적으로 처한 상황을 곧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소아시아로 가는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러나 환상을 본 후, 바울은 즉시 마케도니아로 향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원래 계획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에게서 보는 것은 수동성과 능동성이 긴장을 이루며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춤입니다. 바울은 어디에서 이런 ‘인도하심의 춤’을 배웠을까요? 저는 안디옥 교회를 주목하고 싶습니다. 성령님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 선교사로 파송하라.” 말씀하셨을 때, 안디옥 교회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처음에는 분명히 긴장하고 의심하며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성령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렇다면, 안디옥 교회는 탁월한 리더가 많거나 조직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걸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님께 민감했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큰 교회에 대한 이해 속에서, 가장 소중한 사역자들을 기꺼이 파송할 수 있었습니다. 한 목사가 인도하심의 춤을 배우는 곳은 교회입니다.
[나눔 질문]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능동성과 수동성의 균형을 어떻게 잡고 있는가?"
"내가 속한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가, 아니면 인간적인 논리로만 판단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