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 주교,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많은 사람이 그를 위대한 신학자로, 또는 통찰력 있는 목사로 여긴다. 최근 들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범적인 문화 변증 방법을 찾기 위해서 아우구스티누스를 주목하고 있다.

변증 능력을 키우고 싶은 사람에게 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작품을 추천한다. 하지만 먼저 주의할 점이 있다.
 

도움을 주거나 아니면 해를 끼치는 명칭

아우구스티누스나 교부들로부터 듣고 싶은 변증 시스템을 요구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초기 변증가들과 관련한 존 카바디니의 조언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나중에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나서야 신학에서 나름의 자리를 차지한 “자연” 신학과 “계시” 신학의 대조점을 고찰하는 것보다, 기독교적 헌신을 강화하고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공유된 수사적 관습과 철학적 지혜의 사용에 대한 설득 전략에 주목하는 것이 더 낫다.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 지식”과 같은 시대착오적인 범주에서 그들을 바라보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대의 설득 및 설명 전략에 담긴 천재성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 결과 우리는 그들로부터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차단하는 것이다.

교부들의 접근 방식을 그 시대의 후기로 또는 보다 체계가 잡힌 중세 방식이나 심지어 현대 학파(즉, 전제적 변증론이나 증거적 변증론)에 끼워 맞추는 것은 말 그대로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우리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기는커녕 눈을 멀게 할 것이다. 하지만 도리어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 시대착오도 있을까?

명칭 자체가 주는 어려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문화 변증”과 같은 새로운 용어는 오늘날 사용 가능한 “특정 설득 전략”에 대한 우리의 눈을 뜨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문화 변증을 하나의 체계 내지 시스템으로 보지 않고 단지 상황화나 서사, 문화적으로 다양한 예배자로서의 인간을 강조하는 설득 전략의 집합으로만 이해한다면(켈러 센터의 리더십이 하는 것처럼), “문화 변증가”는 도리어 고대 주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시대착오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주제를 염두에 두고 과거를 돌아본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나 인정하는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화 변증가로 꼽힌다. 먼저 그의 가장 뛰어난 두 작품이 기여한 바를 생각해 보고, 그것들이 오늘날의 맥락에서 변증 분야에 어떤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고백론과 성인이 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을 통해서 그가 어떻게 기독교를 거부하고 욕망을 쫓는 삶을 살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지혜를 발견했는지, 전 과정을 이야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좋은 삶을 향한 십자가 형태의 길을 따라가라고 설득한다.

고백록 초반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린 시절 사실상 자신이 어머니에 의해서 교회에서 자랐지만 지적 성숙을 위해 신앙을 버렸다고 말한다. 그는 유치해 보이는 어머니의 종교를 떠나 마니교에 합류한 과정을 이야기한다. 마니교는 오늘날 강성 합리주의와 어느 정도 유사한 지식 접근 방식을 가진 영지주의 종파이다. 이성만으로 충분하기에 믿음은 필요 없다는 게 마니교의 사상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 독자들이 자신과 비슷한 성장 스토리를 살아갈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이야기로 그들을 도전한다. 이성만으로 충분하다는 신화에 반박하는 전복적인 줄거리 전개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인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어린 시절의 순진함을 고백하고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만큼 겸손해졌을 때야 가능하다는 점을 설파한다. 우리는 누구나 다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실을 인정할 정도로 어른이 된 존재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장 스토리는 오늘날 세속적 서사를 반박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찰스 테일러에 따르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이 종교를 빼고 오로지 과학과 상식적 추론에만 뿌리를 둔 삶을 통해서 성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서 우리는 공감 가능한 성장 스토리를 들을 수 있다. 그는 이성에 대한 더 나은, 더 합리적인 이야기뿐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 신뢰에 달려 있는 방식, 인간의 가장 깊은 욕망이 어떻게 우리를 삶으로 이끌어 가는지, 그리고 무질서한 사랑이 어떻게 진실에 대한 지적 탐구를 어긋나게 하는지를 엮어낸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이야기를 말씀을 통해서 설명한다. 가장 두드러지게는 시편, 누가의 탕자 이야기, 그리고 창세기의 첫 부분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변증 전도를 위한 다양한 학문(주석, 신학, 철학, 심리학, 설교)의 목회적 통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도성, 그리고 서사적 압도

아우구스티누스를 면밀히 읽을 때, 우리는 청중의 갈망과 우려가 사실상 시대의 문화적 특성과 역사적 요인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도성’을 쓴 직접적인 계기는 로마가 약탈당하고 그로 인해 촉발된 목회적, 변증적 우려였다.

로마가 폐허가 되면서 문제가 된 것은 단지 제국의 미래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을 통해 이뤄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걸었기 때문에 약탈당한 로마는 교회의 정통성과 미래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로마가 함락된 후, 이교도 전통주의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향인 북아프리카로 도망쳤고, 그들은 제국의 쇠퇴를 그리스도인들 탓으로 돌렸다. 이러한 언어적 공격은 가뜩이나 지각 변동과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힘들어 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큰 불안을 안겼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윌리엄 밥콕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변증 걸작을 쓸 때 다음 세 그룹을 독자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1) 이교도 비평가, (2) 신앙고백의 경험이 있는 과거 그리스도인, (3) “로마를 위대하게 만든 로마의 모든 종교적, 정치적 전통에 대한 배신, 특히 로마가 숭상했던 모든 신들에 대한 배신의 상징으로 기독교를 비난하는 현실의 무게 아래에서” 흔들리는 현재 그리스도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대응은 정확한 역사 파악,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의 특정 사회적 위치가 가진 전제에의 도전, 그리고 새로운 상황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작지만 차이를 드러내는 신학적 방식의 제공이었다.

그의 전략은 기독교가 제국과 시민의 복지에 해롭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를 능가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도성’ 전반부에서 이교도 라이벌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가하는데, 그들이 자랑하는 권위자의 입을 빌어서 사실상 이교의 역사 이면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책의 후반부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독자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찾아보라고 도전한다. 역사와 인간 경험 그리고 물질세계에 비추어 볼 때 기독교가 얼마나 말이 되는 종교인지를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성경적 비전은 그에게 로마 사회의 사회적 기반을 비판할 수 있는 자원을 제공했다. 세상 재물에 대한 자격을 갖춘 평가와 함께, 성경에 근거한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로마 제국의 신화와 궁극적 목표를 초월하고 비판하도록 하는 유리한 입장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의 문화적 비판은 반대자들을 죽이기 위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었다. 그것은 치유를 위한 칼날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평화” “행복” “정의” 같은 단어로 표현되는 이교도와 로마의 열망이 기독교 서사를 통해서 개종될 때, 어떻게 그 모든 것이 이해되고 성취되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그는 반대자들에게 “행복” 추구를 멈추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에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를 재고하도록 자극한다. 이 삶에서 흔히 만나는 “본질적 선(innate goods)”은 일시적이며,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결국에는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괴로움만을 더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크고 심각한 악의 짐에 짓눌린 인생, 이처럼 크고 심각한 악이 언제라도 닥칠 가능성에 노출된 삶은 결코 행복하다고 불릴 수 없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종류의 행복 가능성을 고려하라고 촉구한다. “누군가가 열렬한 사랑과 변함없는 충성으로 또 다른 삶을 목표로 고대한다면, 그리고 이 땅의 삶을 그 다른 삶을 위해서 쓰고 있다면, 이 땅에서 사는 지금조차도 우리는 그 사람을 행복하다고 부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소망 속의 행복”이라고 불렀다. 행복해지고자 하는 인간 욕망과의 상호 작용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요 설득 전략 중 하나였다. 그는 당시의 지배적인 문화적 서사에 대해서 엄중한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동시에 훌륭한 의사로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약을 제공했다. 겸손하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어떤 환자라도 자신의 이야기가 구원받고 욕망이 치유될 것임을 환자들에게 확신시켰다.
 

치료 시대의 치료적 접근 방식

후기 변증 체계를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 속으로 밀어 넣지 않을 때 또한 ‘고백록’과 ‘하나님의 도성’에 담긴 설득력 있는 전략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접근 방식이 오늘날 치료적이고 소비주의적인 시대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를 더 잘 볼 수 있다. 사람들은 후기 자본주의의 선한 삶에 대한 비전이기도 한 “충만함”과 평화를 여전히 열망한다. 하지만 이 세상은 결코 줄 수 없다.

이런 실패에 대한 증거는 우리 주변에 널렸다. 고대 지혜는 자기표현의 논리를 위해 버려졌다. 이제 개인의 자유는 구원의 목적으로만 기능한다. 소비주의와 대중 심리 치료는 은혜의 수단을 모방한다. 그러나 이 모든 현대적 처방은 도리어 우리를 병들게 했다. 자유 그 자체를 목적으로 개인이 자유를 추구할 때, 우리는 희생적인 사랑에 대한 도덕적 논리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소비주의는 피상적인 활동에 대한 열광을 초래했고, 낙담할 때면 사람들은 자신을 향해서 묻는다. “아니, 이게 전부야?”

의미의 위기를 맞은 오늘날, 대중 심리학은 인간의 절망이나 분노를 없애지 못한다. 현대의 행복 전문가들은 낙관주의가 좋은 삶의 열쇠라고 말하지만, 더 많은 통제력과 여가를 약속한 기술이 정작 상기시키는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폭력과 고통과 죽음 앞에서 무력한가이다. 그 결과 우리는 희망을 품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내동댕이쳐진다. 로버트 퍼트넘은 오늘날 스크린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혼자 볼링 치던” 인간을 혼자 스크롤하게 만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삭제될까 두려워하면서도 우리는 누군가를 삭제하면서 산다. 현대인은 오늘도 불안하게 정체성을 찾고 있다.

윌프레드 맥클레이가 “죄책감의 이상한 지속(The Strange Persistence of Guilt)”에서 보여 주었듯이, 우리 문화는 진정으로 용서하고 용서받는 데 필요한 자원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현대적 추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낀다. 이 불편함에서 벗어나려 시도하는 중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이것들은 모두 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에게 진단하는 질병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편으로 신앙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여전히 평화, 휴식, 사랑을 찾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문제는 잘못된 곳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세속화된 샬롬의 소망을 품은 그들은 과도하게 성적인 마케팅과 유사초월 브랜딩으로 포장된 새로운 신화와 이상한 신들에게 집착한다. 오늘날 아우구스티누스의 문화 변증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비인간적 예배를 비판하는 법과 더불어 그것을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즐거운 예배와 대조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정한 치유로 이어지는 진정한 치료이다.

한번은 이교도들을 교회에 초청했던 한 행사에서 변증 설교를 마친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어서 “즐거움으로 가득 찬 삶으로부터의 논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내용을 참석자들에게 상기시켰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어제도 여러분에게 말씀드렸고 지금도 또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선한 삶을 통해서 전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도 아무 목적 없이 믿은 사람이 될까봐 나는 두렵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즐기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 즐거움을 삶에서도 표현하기를 간청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기쁨이 되도록 하십시오.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삶에서도 기쁨이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집이 되고 그분의 눈에 받아들여져 모든 선한 일에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딤후 2:21).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모두 다 하나님께 합당한 방식으로 산다면, 나는 지금은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조만간 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청중에 맞게 자신의 말을 조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한 변증가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그리고 그는 맥락에 관계없이 가장 강력한 논증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눈으로 본 사람들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출처: Want to Grow as a Cultural Apologist? Learn from August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