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설명]

이 사진은 권혁선 목사가 편의점 내부에서 셀카를 촬영한 모습입니다.

권혁선 목사는 회색 모자와 셔츠, 검정색 조끼를 착용하고 있으며, 무선 이어폰을 귀에 착용하고 있습니다.

배경에는 과자와 사탕류가 진열된 선반이 보이며, 젤리 제품들이 다채로운 포장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상단 선반에는 기저귀와 휴지, 생활용품이 쌓여 있고, 매장 천장에는 LED 조명이 밝게 설치되어 공간 전체가 고르게 조명되고 있습니다.

사진 오른쪽 위에는 'Fresh Food' 문구가 있는 광고판도 걸려 있습니다.

[사진 끝]

 

지금은 유후시대 

대한민국은 이미 고령사회에 들어섰고, 머지않아 초고령사회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제 인생의 절반은 ‘은퇴 이후’에 펼쳐지며, 이 시기는 더 이상 ‘여생’이 아닌 ‘또 다른 생애’가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교회의 사명은 무엇일까요?신앙의 공동체가 함께 늙어가는 성도들의 삶을 축소시키지 않고, 확장된 가능성의 지형으로 안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은 유후시대>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탐색입니다. 은퇴 이후에도 빛나는 삶, 교회가 동행해야 할 시간입니다. 

은퇴, 그리고 새로운 시작

은퇴 후의 삶이란 생각보다 낯설고 헛헛했다. 나처럼 활동적인 사람에겐 특히 더 그랬다. 아무 일도 없이 하루를 보내는 건 고역일 게 뻔했다. 그동안 봐온 은퇴한 목사님들 중엔 그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강단에 서고자 하거나, 후배 교회를 기웃거리는 분들이 있었다. 은퇴 목사 모임이나 각종 행사를 자꾸 만드는 모습도 썩 따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너무 어른스러운’ 은퇴를 고집하는 것 또한 불편하였다.

무리하더라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자, 결심한 까닭이었다. 책상에만 앉아 있는 삶, 아내에게 짐이 되는 삶은 내 성정에도 맞지 않다. 무슨 일이든 새롭게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기도해 온 셈이었다. 그러니까 ‘주님, 노년의 삶이 그저 무의미하지 않게 하시고, 교인들이 보기에도 유익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의미 있는 삶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며 맞은 은퇴였다. 

주유소냐, 편의점이냐’ 갈림길에서

나의 선택지는 두 곳으로 좁혀졌다. 주유소와 편의점. 더 쉬워 보인 건 주유소였다. 기름 넣는 일은 단순해 보였고, 체력도 크게 요구될 것 같지 않았다. 마침 주유소 알바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하였는데 지금은 빈자리가 없고, 알바가 그만두면 연락을 주겠다고 하여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던 중 교인 한 분과 식사 자리에서 주유소 알바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분이 조심스럽게 말렸다. “속초는 눈이 많이 오니까 겨울철에는 주유소 일이 특히 위험합니다. 기름 떨어진 데를 잘못 밟아 미끄러지는 사고가 잦아요. 노인들의 낙상은 크게 다치면 회복이 어렵잖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깊이 생각해 보니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내가 다치는 것도 문제지만, 혹시 다른 사람에게 늙어서 피해를 줄 수도 있으니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아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자 단호히 반대했다. “절대 안 돼. 하지 마.” 아내는 질색을 하며 완강했다. 결국 ‘이건 아니다’ 판단하고 마음을 접었다. 그렇게 주유소 문이 닫히고 나니, 남은 건 편의점이었다. 

밤의 편의점, 또 하나의 교회

그 무렵 편의점을 운영하는 교회 장로님으로부터 편의점 알바에 관한 정보를 들었는데 알바 자리를 얻으려면 일단 유경험자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 ‘장로님 찬스’를 써서라도 경험을 쌓아야겠다 생각하던 참에 심야 알바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걸 알고는 그거라도 해보겠다며 일단 뛰어들었다.

원룸촌 한가운데 있는 가게였다. 야간 영업이 꼭 필요한 구조였다. 알바가 자주 바뀌는 까닭은 진상 손님(JS) 때문이었다. 점주인 장로님의 아내가 잠시 그 일을 했는데 그 JS 출몰 때문에 지금은 아예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했다. 하도 겁을 줘서 은근히 긴장하며 나의 첫 알바 경력이 시작되었다.

야간 아르바이트는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였다.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보니 야간 편의점 알바에 대한 ‘전문지식’이 많이 늘었다. 늦은 밤, 편의점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술에 취한 이들, 조용히 들어와 삼각김밥 하나만 사가는 청년들, 새벽 공사장으로 향하는 노동자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목회 과제를 찾았다.

그렇다고 내가 알바를 하며 특별한 걸 할 수도 없다. 담배 한 갑도 두 손으로 건네고, 매대에 얹은 상품들 중에서 마지막 것은 꼭 내 손으로 직접 건네며 “좋은 밤 되세요” “행복하세요” 인사하는 정도였다. 아침엔 “승리하세요” “힘내세요” 덕담을 건넸다. 그렇다. 그 말은 덕담이면서 또 목사인 나에게는 축도이기도 하였다. 강단은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축도를 놓지 않고 있었다.

진상 손님이 많다는 소문과는 달리, 내가 일한 두 달 동안은 그런 일이 없었다. 술에 취해 병을 깬 사람에게도 조용한 목소리로 “다칠 수 있으니 그냥 가세요” 하면 오히려 미안해하며 돌아갔다. 그렇게 가게를 찾아온 이들은 한 번 두 번 나를 대하는 동안 어느새 표정도, 말투도 달라졌다. 작은 정중함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었다. 

이름 없는 전도, 진심의 사역

그런 관계는 조금씩 깊어졌다. 어젯밤 술에 취해 찾은 손님이 다음 날 다시 왔는데 “어제는 많이 힘드셨나 봐요” 말했던 것 같다. 나로선 으레 하는 인사였다. 그런데 이분의 눈가가 순간 촉촉해지는 듯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이야기는 삶의 아픈 상처들이었다. 아버지가 평생 무능했다는 이야기,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맞았다는 이야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생각했다. 왜 그는 주변 사람에게 하지 못할 이야기를 나에게 털어놓을까? 아마도 익명성과 신뢰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편의점 아저씨는 이름도, 주소도, 관계도 없다. 그러니 마음을 열 수 있는 것이다.

그곳 편의점 야간 알바는 두 달만 하고 그만두었다. 그럼에도 어떤 분에게는 전도까지 했다. 노골적인 복음전도는 아니었지만 “종교를 한번 가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하고 말을 건넬 수는 있었다. 만약 더 오래 일했다면, 아마 그들의 삶 속에 복음을 천천히 심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나간 뒤엔 여러 사람들이 “그 할아버지 어디 갔어요?” 하고 물었다고 한다. 비록 두 달이라는 시간이 어떤 결실을 얻기에는 짧았지만 어쨌든 누군가의 마음에 뭔가를 남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세상 살면서 그런 영향력을 누군가에게 남기기란 결코 쉽지 않아서다.

그 후 나는 두 달 야간 근무경력을 밑천 삼아 속초에서 지금의 편의점 알바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는 새벽 여섯 시부터 정오까지 여섯 시간 근무한다. 잠 못 자는 야간 근무에 비해 오전 근무는 그야말로 ‘개꿀’이다. 편의점이라는 공간, 작고 조용한 그곳에서 나는 수입을 얻고 또 생각지 못한 새 사역을 하고 있다. 이 이름도 없는 목회, 그러나 진심을 다하는 나의 새로운 목회현장이 생긴 셈이다.

박명철 작가가 권혁선 목사를 인터뷰하고, 권혁선 목사 1인칭 시점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권혁선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인천 풍성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풍성교회의 파송을 받아  분립개척한 '소망이 풍성한 교회(소풍교회)'에서 목회를 이어가다가 사임하고 동남아시아로 선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선교 사역을 마친 뒤에는 제주도에서 다시 아카페교회를 개척하였고, 70세를 맞아 은퇴하였습니다. 권혁선 목사의 목회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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