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설명]
이 사진은 석양 무렵 하늘을 나는 새들을 촬영한 풍경 사진입니다.
사진 상단에는 점차 어두워지는 맑은 하늘이, 하단에는 붉은빛이 감도는 저녁노을이 펼쳐져 있습니다.
하늘 중앙에는 새 네 마리가 오른쪽을 향해 비행 중이며, 실루엣만 보일 정도로 어두운 윤곽을 띠고 있습니다.
아래쪽에는 나뭇가지가 드러난 겨울철 숲의 실루엣이 검게 드리워져 있어, 전체적으로 고요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사진 끝]
목회의 긴장(tension)은 신학적·목회적 균형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긴장입니다. 그 긴장은 11년 전 교회개척 이후에 끊임없이 다양한 옷을 입고 찾아왔습니다. 인생과 교회의 계절에 맞춰 입을 수밖에 없었던 목사의 긴장들을 런웨이에 하나씩 올리는 마음으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개척을 준비하는 목회자와 이제 막 교회를 시작한 목회자들이 마주할 긴장과 고민을 염두에 두고 글을 씁니다. _글쓴이 박용주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성도 각자는 생각하고 분별하며 책임을 지는 존재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참여의 리더십은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반드시 필요한 방식입니다. 목회자는 모든 사안을 독단으로 결정하지 말고 성도들의 의견과 지혜, 영적 분별을 존중하며 함께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한 존재입니다. 리더에게는 자신의 유익과 편의를 앞세우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다수의 여론에 휘둘릴 위험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의견이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아니기에, 리더는 때로 결단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합니다. 혼란 속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때로는 고독하게 결정하며,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권위주의와는 다른 차원의 ‘믿음의 결단’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에서 나오는 용기입니다.
참여의 리더십과 결단의 리더십은 모두 성경 속에서 리더십의 중요한 두 축으로 나타납니다. 모세가 모든 문제를 혼자 감당하다 지쳐 있을 때, 그의 장인 이드로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이 일은 너 혼자만 할 일이 아니다.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을 뽑아라. 그들이 백성을 재판하게 하여, 너는 큰 일만 맡고 작은 일은 그들이 맡게 하여라.”(출 18:17-23) 이는 백성의 참여와 공동 리더십 구조의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구제 문제를 두고 불만이 일어나자, 사도들은 공동체의 의견을 묻고 직분자를 세웁니다(행 6:1-6). 참여의 리더십은 교회의 각 구성원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와 형상에 따라 공동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하나 됨을 이루는 방식입니다(고린도전서 12장). 목회자는 형상에 대한 신뢰와 존중 속에 경청자이자 조율자, 협력자의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가나안 정착 이후 믿음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는 시점에, 여호수아는 결단과 본을 통해 방향을 제시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섬길 자를 택하십시오. … 그러나 나와 내 집은 주님을 섬기겠습니다.”(수 24:15)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포기하고 주저앉은 이들에게 느헤미야는 외칩니다. “자, 예루살렘 성을 다시 세워, 이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자 그들은 “자, 성을 다시 쌓읍시다!” 하면서, 이 선한 일에 힘을 내어 착수하였다(느 2:17-20). 이처럼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담은 분명한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고, 이에 따른 결단을 촉구하는 리더의 역할이 강조됩니다. 사도 바울은 공동체를 이끄는 사역에는 저항과 비난이 있음을 전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때가 좋든지 나쁘든지 힘을 쓰십시오. 참을성을 가지고, 친절하게 가르치면서 꾸짖고, 나무라고, 권하십시오.”(딤후 4:2) 목회자는 공동체 앞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결단하며, 진리를 대변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림자
그렇지만 참여의 리더십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위험합니다. “모든 의견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문화는 쉽게 “모든 의견이 옳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울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과 직분의 권위가 도전을 받기도 합니다(민 12:1-2). 결정하지 못하는 교회가 되기도 하고, 모두가 의견은 내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로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지도자가 결정을 미루거나 회피할 때, 단지 영적 리더십만 무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더 큰 갈등과 분열로 빠져들게 됩니다. 형상을 존중한다는 명분 아래 모든 의견을 수렴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깊은 신학적 충돌이나 영적 분별을 놓치게 됩니다. 참여의 리더십에 대한 기대가 강한 공동체일수록 갈등을 회피하는 경향이 심리 구조로 고착되어, 예언자적 설교와 리더십이 설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결국 그런 공동체는 겉으로는 위로와 수용을 반복할지 모르나, 그 내부는 균열된 공동체, 혹은 피상적인 공동체에 머무르게 됩니다.
결단의 리더십만을 강조하는 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결단 중심의 리더십은 근대화, 위기극복, 유교문화라는 배경 속에서 한국 교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습니다. 그 결과, 목회자는 오랫동안 강한 비전, 단호한 결정, 이견 없는 통솔력을 갖춘 리더로 이상화되어 왔습니다. 결단의 리더십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성도의 존엄성과 자율성 곧 형상의 존중이 약화됩니다. 은사의 다양성과 몸된 교회의 유기성(고전 12장)이 파괴되고, 성도들의 성장은 위축됩니다. 모든 판단이 한 사람에게 집중될 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공동으로 분별하는 과정은 생략되기 쉽고, 결국 교회 안에서 복음의 풍성함은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체는 책임을 함께 지지 않게 되고, 문제가 발생하면 리더만이 비난받는 구조가 형성됩니다. 이는 건강한 교회 생태계를 약화시키며, 목회자의 소진(burnout)을 가속화합니다.
치우침의 위험
현대 문화는 대체로 ‘참여의 리더십’에는 호의적이고, ‘결단의 리더십’에는 경계심을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인의 의견 존중, 다양성, 수평 관계를 중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함께 결정하고, 함께 책임지는 리더십”이 리더의 이상으로 간주됩니다. 위계보다는 소통과 공감, 의견 수렴과 협력이 강조되고, “우리가 함께 만든 결정”이라는 정체성과 동기부여가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또한 지도자의 말보다 공동의 판단을 더 신뢰하며, 리더의 일방적인 판단이나 명령에는 불편함을 느끼기 쉽습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목회자의 결단은 ‘강요’나 ‘억압’으로 오해받을 수 있고, 때로는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특히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확신 있는 발언 자체가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며 고압적으로 비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문화와 정서에 깊이 젖어 있는 젊은 목회자와 젊은 회중은 어느 한쪽으로 쉽게 치우칠 수 있습니다. 교회를 개척할 당시에 저 역시 참여의 리더십에 많이 기울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권위가 오용되었던 역사에 대한 반감이 있었고, 그로 인해 권위 자체를 부정하거나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주어진 책임을 수행하는 것조차 ‘권위주의’로 여겨졌습니다. “함께 의논하자”는 말은 사실상 “나는 결정을 회피하겠다”는 의미로 작동했습니다. 결단을 내리는 순간에 누군가는 거절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목회자다.” “권위주의적이다.” 이런 비난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상처 혹은 문화의 무게로 인해 기울어진 리더십은 공동체의 방향을 흐리게 만들었고, 결국 혼란과 갈등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저는 결단의 리더십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지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회중의 참여는 하나님의 형상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동시에, 지도자의 결단은 타락한 인간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어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권위 있는 말씀이야말로 그 결단을 이끄는 기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회중 역시 치우침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수직적 권위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문화의 압력 속에서, 결단의 리더십은 자칫 위협적이고 강압적인 리더십으로만 느끼기 쉬워집니다. “나도 하나님의 형상이다”라는 표현이 “내 의견은 무조건 존중받아야 한다”는 개인주의로 오염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이 수용되지 않으면 “목회자가 소통하지 않는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서 내려진 결단이 자신의 생각과 다를 때, 이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적 권위의 행사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결정 자체를 불신하거나 무시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참여하지 않은 의사결정 곧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탑다운) 결정은 모두 부정하고 싶어지는 심리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결단과 참여가 분리되거나 서로를 경계하는 문화 속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질서 있는 공동체를 세우기가 어렵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 다른 은사를 지닌 지체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연합하는 ‘몸’입니다. 참여만 있고 결단이 없다면 방향이 흐려지고, 결단만 있고 참여가 무시된다면 공동체성은 파괴됩니다. 참여 없는 결단은 독단이 되고, 결단 없는 참여는 무정부 상태에 이릅니다. 이 긴장을 붙들지 못하면, 결정의 과정에서 상처를 주고받게 됩니다. 결정을 내리는 목회자도 (또는 당회도) 그 결정을 받아들이는 회중도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처럼 공감 없이 밀어붙인 결단은 권위주의라는 오해를 낳고, 참여만을 내세운 회피는 책임을 떠넘기는 구조로 이어집니다. 그 결과, 관계는 무너지고 공동체는 표류하게 됩니다.
참여와 결단, 복음 안에서 함께 걷기
교회 운영과 관련하여 문화의 영향력과 상처의 파괴력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힘을 이기는 유일한 능력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임을 선포함으로써, 회중에게 참여의 당위성과 능력을 회복시킵니다. 동시에, 우리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임을 정직하게 비추며,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안에서 지도자의 결단을 신뢰할 이유를 제시합니다. 복음은 누구도 절대시하지 않고, 누구도 배제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지도자의 결단과 회중의 참여 모두에, 성령의 인도하심과 십자가의 겸손을 요청합니다. 형상만 강조하면, 리더는 다수의 감정과 흐름에 휘둘리게 되고, 타락만 강조하면 공동체는 침묵과 위축 속에 머무르며, 리더는 독단과 오해 속에 고립됩니다. 복음은 이 두 긴장을 함께 붙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신뢰하기에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함께 교회를 세우고, 인간의 타락성을 기억하기에 복음의 기준에 따라 결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회중 모두가 복음 안에서 형상과 타락의 긴장을 기억할 때, 진정한 리더십의 조화가 가능해집니다.
교회의 모든 지도자는 참여와 결단 사이의 긴장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회중이 기쁨으로 참여하며 함께 교회를 세워갈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 주되, 공동체가 방향을 잃지 않도록 진리를 붙든 결단을 감당해야 합니다. “몸된 교회의 지체인 당신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당신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나는 진리를 붙잡고, 때로는 고독하게 결단하겠습니다.” 회중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을 붙들고 부름 받은 자로서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동시에, 자신 안에 있는 타락한 인식의 한계를 기억하며, 지도자의 결단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복음적 리더십의 긴장을 함께 품을 때, 교회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엡 4:15). 상처가 전혀 없는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유된 흔적이 가득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