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hu Bhosale/Unsplash
Rishu Bhosale/Unsplash

[사진 설명]

이 사진은 철제 구조물 너머로 찍은 비둘기의 모습입니다.

비둘기는 몸을 바닥에 붙인 채 쉬고 있으며, 녹슨 철제 울타리의 둥근 틈 사이로 머리 부분이 정확히 들어와 있습니다.

깃털은 회색을 띠며, 목 부분에는 초록빛 광택이 도는 깃털이 특징적으로 보입니다.

눈은 밝은 주황색으로 또렷하게 강조되어 있으며, 배경은 갈색 벽과 낡은 바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조물의 녹슨 질감과 비둘기의 매끄러운 깃털이 대조를 이루며, 시선을 비둘기의 얼굴로 자연스럽게 유도합니다.

[사진 끝]

 

댈러스에서의 여름살이는 이민자의 삶만큼이나 버겁다. 바싹 달구어진 아스팔트의 열기를 피할 나지막한 산 하나, 둘레길도 몇 없으니 삶이 훨씬 힘들 수밖에 없다. 하루 일을 끝내고 들어오면 어떻게 내일을 견딜 수 있을까 괜히 두려워진다. 피곤을 덜려고 생각도 단순하게 하고 행동도 평소보다 느리게 해서 에너지를 비축하는 생존습관을 터득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이 나이에도 다음날을 기다리며 격하게 가슴이 설렐 때가 있다. 한 달에 딱 한 번씩 순수한 아이의 영혼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꽃의 도시 플라워 마운드에 가기 전날에는 자작자작 심장이 타 들어간다. 나지막한 꽃 언덕 길 옆으로 목장들을 스쳐 지나가면 성큼 다가와 안기는 구름을 헤집으며 뛰어놀 상상에 어느새 잠이 달아나 버린다. 그런데 단지 이 풍광 때문에 이 도시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비둘기들의 험난한 생존기가 빚어내는 구원의 서사가 나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처럼 그 성스러운 하나님의 손길을 묵도하러 나는 그 언덕을 찾는다.

내 지인 종복이의 가게 간판 위에서 살아가는 비둘기들의 이야기(“간판 위 비둘기”)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오늘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 지난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이곳 번화가의 한 곳에서 치킨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던 종복이에게서 나에게 도와 달라는 연락이 왔다. 자기 가게 간판 위에서 배설물을 쏟아내는 비둘기들을 내어 쫓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눈으로 확인해 보니 장사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음식점 정문 앞이 지저분해 바로 손을 써야 했다. 간판 위로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가 보았다. 비둘기들이 간판 뒤 공간의 너른 곳에 살고 있었다. 햇볕과 비, 천적의 눈을 피하기 좋게 움푹 들어가 있어 그들에게는 너무나 안전한 곳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배설물이 쌓여 있고 아직 부화 못한 알들도 있어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기로 하고 물러났다. 몇 주 후 그곳을 다시 찾아 비둘기들을 내어 쫓고 배설물을 한참동안 씻어내린 후 비둘기들이 앉을 공간이 없도록 날카로운 플라스틱 침들을 촘촘히 붙여 발을 못 붙이게 하였다. 그 후 한참동안 비둘기들을 잊고 살았다. 그러나 생명체들이 그리 쉽게 자기들의 쉼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 경험의 촉이 나를 재촉해 종복이에게 전화를 걸게 하였다. 역시 그랬다. 쫓겨 나갔던 비둘기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놀라기도 했지만 밀려오는 의문을 참기 힘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 날카로운 침 위에서 고통을 견디며 살 수 있을까. 바로 차를 몰아 급하게 가 보았다. 이때 높은 사다리에 매달려 바라본 비둘기들의 생존기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한편의 구원의 드라마였다. 나뭇잎 몇 장을 찌르는 침 위에 깔고 그 위에 가지런히 알을 낳고 돌보며 살아가는 비둘기들을 보니 형언 못할 감동이 밀려 들어와 나를 삼키기 시작했다. 호흡과 시간이 멈추고 아득한 내 시야에 한편의 파노라마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그 옛날 가난한 자들의 제물이 되어 쪼개져 태워지던 비둘기들, 자기들의 죄를 대신해 죽어가는 조그만 새들을 보며 한없이 슬퍼하며 죄를 뉘우치던 그 곤고한 자들의 눈물....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르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한 청년, 이를 보며 후회, 한탄, 회한,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죄인임을 고백하던 그 사람들.... 그 장면이 하나의 그림으로 내 앞에서 펼쳐졌다.

한 달에 한 번씩 이곳에 일하러 가서 종복이에게 듣는 얘기는 주로 어려운 비즈니스의 형편에 관한 이야기였다. 팬데믹 이후로 뛰는 물가와 기울어진 경제는 손을 쓰기 힘든 지경이어서 그의 가게 매출도 점차 떨어져 가고 있었다. 종복이도 다른 사람들처럼 비즈니스를 팔려고 내놓고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워낙 긍정적인 청년이라 이런 저런 계획을 세워놓고 가게만 팔리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언뜻 스쳐가는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보였다, 불안, 초조, 걱정이 왜 없지 않겠는가. 사람인데. 그의 심란한 심정을 모르는지 비둘기들은 계속 늘어만 갔다.

종복이가 다행히 가게를 팔고 떠나기 몇 달 전, 나는 비둘기들의 형편이 궁금해 쉬는 날 찾아갔다. 사다리를 올라 고개를 불쑥 내민 나를 보고 놀란 비둘기들이 모두 날아가 버리자 그들의 사는 공간이 고스란히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너른 공간에 촘촘히 박혀 있던 침들은 어디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작은 새들이 어떻게? 하며 의심스런 눈으로 가까이 몸을 기울여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때 아! 하며 감탄사가 나와 버렸다. “그렇지, 살아있는 것들이란 역시” 그 침들은 사라진 게 아니라 묻힌 것이었다. 그 하얗고 푸르게 불어터진 배설물로, 이른바 똥으로.. 그 길고 강한 가시 골짜기를 냄새나는 물질로 다 메워 무용지물로 만들고 평지로 닦아 그 위에 삶의 터전을 삼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장면이 조금도 더럽거나 불결하지 않았나 보다. 그 배설물 범벅에 가까이 몸을 밀착하고 하나하나 눈에 담아 두었다. 바라볼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놀라워 보였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 힘도 없는 새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먹고 배설하고 저절로 메워지는 그저 하찮은 일이었다. 그런데 이 무익한 일이 그들을 살리는 온전한 구원의 서사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내가 겪은 일들의 의미를 찾기 위해 마가복음 10장을 찾아 읽었다. 예수의 제자도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서 4개의 에피소드로 전개된다. 먼저 어린아이들의 부모들이 예수께 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온다. 그러자 예수의 제자들이 꾸짖으며 아이들을 밀어낸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다” 하시고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여 보내신다.

다음에는 재산이 많은 유력한 유대인이 예수를 찾아와 묻는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 사람은 예수를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지 아는 율법 선생으로 알고 있다. 그런 의도를 아시고 예수께서 답 하신다.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시자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다고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다. 주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네가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그 부자는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고 예수를 떠나가고 만다.

제자들은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사람도 예수를 따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걱정한다. 이때 예수께서 분명한 답변을 하신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가복음 10장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에 벌어진 이야기들이다. 제자들은 이 와중에서도 예루살렘의 화려한 영광을 기대하며 한껏 부풀어 있다. 누가 그 날의 찬란한 영광을 차지할지에 관심이 집중되어 서로 다투기까지 한다. 그곳에 가면 멸시와 핍박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다시 부활하신다고 해도 제자들은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윽고 예루살렘에서 하룻길도 되지 않는 여리고를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누가 과연 예수를 따를 수 있을까 하는 제자들의 의문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았다. 이때 앞을 못 보는 바디메오가 예수를 향해 크게 외친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조용하라고 주위 사람들이 꾸짖기 시작한다. 그래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계속 소리친다. 예수께서 그를 부르시고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신다. 보기를 원한다고 하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며 그를 보내신다. 눈을 뜨게 된 바디메오는 그 자리에서 자기 옷을 내버리고 즉시 예수를 따라 나선다. 누가 제자인가?

4개의 에피소드, 어린이, 부자, 제자, 그리고 바디메오와 예수의 만남은 예수의 제자도를 함의하고 있다. 부모들을 따라 예수에게 온 힘없는 어린이아들과 앞을 못 보고 무력하게 살아가는 바디메오가 예수의 제자도를 따르고 있다. 반대로 재물을 놓지 못해 떠나간 그 부자와 권력욕에 가려 십자가를 거부하는 제자들은 예수의 길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예수께 나아온 아이들과 바디메오는 무엇이 달랐을까. 무력한 아이의 그 모습대로 예수께 나아온 것 말고는 다른 설명이 없다. 바디메오도 역시 그렇다. 다윗의 자손에게 자기를 살려 달라고 외친 것밖에는 없다. 예수께서 이 고백을 들으시고 그를 구원하신다. 사실 살려달라는 외침은 응답이 없으면 제로가 되어 그대로 사라지는 헛된 수고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무익한 자의 아우성은 주의 구원의 은혜의 손길이 있어야만 믿음의 고백이 되어 그를 살리게 한다.

비둘기들이 한 것이라고는 먹고 배설하는 것밖에 없었다. 이들이 살기 위해 한 일은 오직 초라한 본능에 기대 겨우 하루를 연장하는 것이었다. 비참하고 무력하기 그지없는 비둘기들의 먹고 배설하는 행위는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바디메오의 외침과 다를 게 없다. 그렇게 무익하게 하루를 연명하는데 그 가시가 차곡차곡 메워지고 평탄하게 되는 구원의 서사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에 우연은 없다. 하나님의 신비한 구원의 흔적들이 삶의 흔적마다 새겨져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 후 들여다보아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뿐이다.

2022년 봄 어느 날 인것 같다. 일하고 오피스로 돌아와 클래식을 들으려고 컴퓨터 영상을 찾았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한 어린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페이지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루 이틀 지난 것 같은데 이미 백만 뷰를 넘어가고 있어 뭔 일이 일어난지 싶었다. 이 연주를 한 Cliburn Competition이 열린 곳은 Fort Worth, 내가 사는 곳에서 30여분밖에 안 되는 곳이라 반색하며 들어 보았다. 평소 피아노곡을 즐겨 듣지 않는데 이 날은 긴 시간을 흠뻑 빠져서 들었다. 내 짧지 않은 인생에 처음 생긴 일이었다. 열여덟 살 어린 연주자, 그의 결선 곡 중 하나였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지금까지도 여러 번 들었는데 매번 끝까지 들을 수 있는 게 내게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왜 중단하지 않고 계속 들을 수 있었을까 계속 생각하다 영상에 달린 댓글들을 찾아 읽어 보았다. 나 같은 문외한들도 적지 않게 하는 말이 있었다. 이 연주를 들으면 라흐마니노프와 음악의 위대함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계속 댓글을 읽어가다 그 당시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같이 했던 한 연주가의 긴 댓글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여러 번 이 곡을 다른 피아니스트들이 앞서 연주했는데 임윤찬은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다르게 연주했다. 대부분 오케스트라가 피아니스트에 조심스럽게 맞추어 가며 긴장하며 연주했는데 임윤찬은 매우 열정적이고 활기차게 연주하며 우리를 이끌어 갈 것이라는 믿음을 주어 안도하게 하였다. 나는 연주가 끝나고 다른 단원들과 이야기를 하였는데 우리 모두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와 동료들은 그 특별한 순간을 다시 떠올리기 위하여 라이브 스트리밍을 들었는데, 그것은 ‘음악의 고귀함’ 그 자체였다. 누구를 위한 연주가 아니라 음악에 대한 헌신임을 알고 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음악의 고귀함! 나도 그것을 매번 느끼고 있었다. 음악가는 음악의 고귀함을 알리고 새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의 무익한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듯이....

비둘기들에게 그 아프게 찌르는 가시는 자신의 약함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였다. 사도 바울도 육체의 가시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나님께서 가져가기를 간구하였지만 내가 약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진다고 고백한다. 내 삶의 가시가 사라져야 평탄한 게 아니라 그 가시를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나야 내 삶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극복하고 위대한 성취를 하든 실패하든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게 되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야 우리의 무익한 일상이 의미가 생긴다. 나는 아름다운 플라워 마운드를 순례하듯이 오늘 십자가의 언덕을 사모하며 하루를 보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