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설명]
이 사진은 짙은 안개 속 교회 건물 사진입니다.
화면 중앙에는 첨탑이 뾰족하게 솟은 고딕 양식의 교회 건물이 실루엣 형태로 보입니다.
첨탑 끝에는 풍향계가 설치되어 있고, 건물의 지붕에는 십자가가 두 개 보입니다.
짙은 안개로 인해 건물의 디테일은 흐릿하게 드러나며, 배경의 나무들도 희미하게 윤곽만 보입니다.
전체 색조는 연한 베이지빛으로, 새벽이나 해질 무렵의 자연광이 안개를 통해 부드럽게 퍼진 듯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사진 끝]
경외의 성향은 창조적 선물로 선-형성되었으므로 소멸하지는 않지만, 언제든지 쇠퇴하고 비활성화되고 전도된 경외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이성과 감성이 창조적 선물로 선-형성되었으므로 소멸하지는 않지만, 활성화되고 비활성화되고, 전도된 방향과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의 삶에서 경외의 성향이 약화되고 비활성화될 때 거만이 자리 잡게 된다. 경외는 우리로 하여금 성장과 감사와 공명을 향하도록 성향 지어 주지만, 거만은 오만 형태의 삶을 형성하게 한다. 무엇보다 오만 형태는 자아 숭배로 기우는 전도된 경외를 발생시킨다. 전도된 경외는 형성하는 신적 신비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자율적 자아에 대한 경외로 빠져 자신의 역할 성취와 자아 증진을 통해서만 삶의 가치를 평가하게 한다. 우리가 역할 성취와 생체적 즐거움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가 지속되는 한, 우리는 경외에 대한 우리의 선-성향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각각의 사물과 사건의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의 토대인 신적 신비에 대한 경외를 상실하게 된다.
경외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구체성 안에서 신적 신비의 현현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 반면에 신적 신비에 대한 경외를 상실해 갈 때 오만 형태의 전도된 경외를 발생시킨다. 우리는 하나님 또는 형성하는 신적 신비에 대한 경외가 아니라 거룩한 것으로부터 고립된 상태에 있는 우리의 자율적인 자아에 대한 경외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전도된 경외에 지배되는 한, 우리는 형성하는 신적 신비에 의해 주어지는 선물로서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는 시력을 상실하게 된다. 창조적 선물인 역할적, 생체적 성향이 경외로 환원되어서는 안 되지만, 경외의 위치를 대신 차지해서는 안 된다.
경외의 성향이 약화되고 오만 형태가 강화될 때 재화와 물질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려는 전도된 경외가 강화될 수 있다. 특히 전도된 경외는 돈의 ‘우상성’과 관계되어 흔하게 발생한다. 존 헐은 우리 시대는 하나님까지도 물화(物化)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은 이론이나 관념 속에서는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자리에 돈이 자리하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고 했다(John Hull, “Bargaining with God: Religious Development and Economic Socialization,” Journal of Psychology and Theology, 27/3, 241-42). 돈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돈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차적인 수단일 뿐 아니라 사람들 간에 상품과 서비스의 교환을 돕는 매개체이다. 그러나 돈은 이미 매개적 도구 이상으로서 사람들의 가치와 사상을 움직이고 사로잡는 정신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돈의 정신성은 인간과 하나님까지도 물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돈은 전도된 경외를 발생시킬 수 있다.
참된 경외는 예배를 통해 가장 심오하게 표출될 수 있지만, 전도된 경외는 예배 의식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까지도 물화시킬 수 있다. 윌리에 제임스 제닝스는 예배가 소비주의 정신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는 1444년 8월 8일에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잡아 포르투갈 항구에 도착했을 때, 잡아 온 아프리카 사람들을 ‘검은 금’으로 여기고 십일조를 드리는 의식을 거행했다. 예배 의식을 중요하게 여겼던 서구 기독교 역사에서 인간됨을 백인으로 축소하고 아프리카인의 몸을 재산으로 환원하여 교회에 예물로 드렸다. 제닝스는 이렇게 전도된 예배의 근본적 원인은 기독교의 속화 또는 물화에 있다고 했다(Willie James Jennings, The Christian Imagination, 16, 196).
우리는 사람들과 사물들과 사건들 안에서 신적 현현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인식해야 하지만, 이러한 것들에 경이로운 형태 잠재력을 허락해 주는 신적 신비에 대한 경외 안에 통합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경외의 성향은 공명적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자기 자아만을 주인 삼으려는 영적 교만에 맞서게 한다.
우리가 경외의 성향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될 때 실존의 지루함을 타개하기 위해서 전도된 환상적인 삶을 발달시키게 된다. 이런 환상적인 삶은 식별되지 않은 충동들과 현란한 야망들, 무의미한 일상사를 탈출하기 위해서 신기하고 기이한 것들, 가장 새로운 것들, 그리고 자신들의 종교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형성 전통들 안팎에서 출현하는 일시적인 유행들이나 기이한 사건들을 향한 반형성적인 성향을 발달시켜 갈 수 있다. 특히 반형성적 성향은 어떤 기이한 현상만을 영적 성향으로 삼으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따라서 반형성적 성향에 잠식되게 되면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내세워 창조 세계 안에서 펼쳐지는 신적 현현과 일상적 삶의 중요성을 무시하고 왜곡할 위험이 있다.
무엇보다 전도된 경외 형태인 거만은 영적 빈곤에 빠지게 한다. 우리가 영적 빈곤에 빠질 때 기쁨과 찬양의 삶에 무능력해진다. 영적 빈곤을 깨우는 핵심적인 성향 가운데 하나가 경외의 성향이다. 경외는 우리의 삶에서 한탄보다 감사와 기쁨을 깨운다. 아씨시의 프란시스는 우리의 삶에서 기쁨의 중요성을 알았다. 그는 말했다.
“악마가 우리에게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있다면 그것은 악마에게 위대한 승리가 될 것이다. 악마는 섬세한 먼지들을 갖고 다니는데, 영혼의 광휘와 순수한 성향을 흐리게 만들기 위하여 양심의 틈새에 조금씩 그 먼지를 뿌리고 다니는 것이다. 영적인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기쁨은 죽음을 초래하는 그러한 뱀의 독을 물리친다. 어떤 사람이 슬프고 그의 걱정 가운데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슬픔이 그에게 상처를 내고 있는 것이거나 그가 자신을 공허한 산만함에 내맡기는 것이다. 슬픔이 확고하게 되면, 악이 자라나게 된다.” (Dorothee Solle, The Silence Cry, 282에서 인용).
우리가 영적으로 빈곤할 때 가장 쉽게 나타나는 것이 우울과 슬픔이다. 영적으로 빈곤할 때는 우울과 슬픔이 우리를 사로잡아버리기 쉽다. 이때 우리는 잘 보지 못하고, 맛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되므로 예배와 기도도 못하는 상태, 즉 극한 슬픔과 우울의 먼지로 가득하여 기쁨을 상실하게 된다. 우울과 슬픔이 기쁨으로 해소되지 않으면, 지속적인 해로움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경외의 성향은 우리 안에서 기쁨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참된 경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향을 넘어 우리의 기도, 노래, 춤이 회복하도록 촉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