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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헬라 시대의 복음은 '승전보'였다- [ 쉽게읽는중간사 ] (6) | ||||
| 분류 | 성경과 신학 | ||||
| 작성자 | 전체관리자 | 작성일 | 2025-08-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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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 시대의 복음은 '승전보'였다 [ 쉽게읽는중간사 ] (6) [그림]
[그림 설명]
이 이미지는 고전 회화로, 고대 그리스 전쟁 장면을 묘사한 역사적 회화입니다. 이 회화에서는 중심 인물이 투구와 방패를 들고 서 있으며, 주변에는 무장한 병사들과 나체의 인물들이 함께 있습니다. 몇몇 인물은 승리의 상징인 월계관을 들고 있고, 일부는 부상자나 죽은 자를 돌보고 있습니다. 화면 왼쪽에는 제단과 ‘HERAKLES’라는 비문이 보이며, 이는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에게 바치는 제사일 수 있습니다. 오른쪽 배경에는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결전을 준비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영웅적 희생과 전투의 긴장감, 그리고 고대의 신화적 분위기가 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림 끝]
바사는 늘 그리스 정복을 꿈꿨다. 다리오가 이 일에 착수한다.
그렇게 해서 주전 490년에 마라톤 전투가 일어난다.
바사의 원정군은 전함 600척에 보병 10만, 기병 1만이었고 아테네는 1만 명의 기갑병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아테네의 밀티아데스 장군이 열 배가 넘는 바사군을 궤멸시켰다.
아테네의 손실은 192명뿐이었다고 한다.
그 시각, 아테네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렸을까? 필리피데스가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서 단숨에 아테네까지 달렸다.
그런데 숨 한 번 제대로 몰아쉴 틈도 없이 달린 때문이었을까?
"우리가 이겼다!"라는 소식을 전하고는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우리가 다 아는 마라톤의 기원이다.
우리는 복음을 종교 용어로 알고 있지만 헬라 시대에는 전쟁 용어였다. 승전보를 복음이라고 했다.
그런데 필리피데스가 달린 거리가 정말로 42.195km였을까?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근대 올림픽 때는 필리피데스가 달린 그대로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까지 달렸다.
그 후 한동안 올림픽 때마다 거리에 차이가 있었다.
제4회 런던올림픽 때 마라톤 코스는 41.842km였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 왕비가 경기를 보러 오는 바람에 왕비 앞까지 뛰게 하느라 코스가 연장됐다.
이때의 거리가 42.195km였다.
어쨌든 다리오는 숙원 사업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고, 아하수에로가 왕이 됐다. 주전 485년에서 주전 464년까지 바사를 다스렸는데, 아하수에로 역시 그리스 정복에 혈안이었다.
다리오가 죽은 후 사방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반란을 진압하자, 바로 그리스 침공 계획을 세운다.
우선 그리스까지 일시에 진격하기 위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다리를 만들기로 했다. 무려 1300m에 이르는 대공사였다. 우여곡절 끝에 다리가 완공됐는데 공교롭게도 폭풍이 몰아쳤고, 기껏 만든 다리가 부서지고 말았다.
소식을 들은 아하수에로가 크게 노했다. 바다에 채찍 300대를 치라고 명했다. 또 족쇄 한 쌍을 바다에 던져 넣으라고 했다. 채찍질을 하기에 앞서 이렇게 외치라고 했다.
"이 짜고 쓴 물 놈아! 너의 주인께서 너에게 이런 벌을 내리셨다.
너의 주인께서는 너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셨는데, 네놈이 먼저 주인께 활을 당겼기 때문이다.
아하수에로 왕께서는 네가 무슨 짓을 하든지 너를 건너가실 것이다.
그리고 네놈에게 공물을 바치는 자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네놈처럼 탁하고 짜고 쓴 물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다.
" 아하수에로는 자기의 통치권이 바다에도 미친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의 명령대로 바다에 채찍질을 하고 족쇄를 집어던진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런 아하수에로였으니 그리스가 복종하지 않는 것을 잠시도 묵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주전 480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 원정에 나섰다.
헤로도토스는 150만 명이 넘었다고 기록에 남겼지만, 오늘날의 학자들은 30만 명 정도의 규모였을 것이라고 한다.
바사군은 배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서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넜고 그리스는 그리스 중부의 산악 지방 테르모필레의 험준한 산길을 방어선으로 삼았다.
그런데 숫자가 너무 적었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왕이 이끄는 전사 300명과 펠로폰네소스 곳곳에서
차출된 병사와 테베 등지에서 파견된 병사를 포함해서 4000명 정도가 전부였다.
마침 올림피아에서 축제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상황인데 축제를 이유로 출병하지 않는 것이 의아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전쟁을 할 수 없는 기간에 전쟁을 하는 것이 몰상식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하수에로가 테르모필레 돌파를 강행하지 않고 정예 병력을 선발해서 산지를 우회했다. 이 사실을 안 레오니다스 왕이 다른 병사 8000명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만으로 테르모필레를 사수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수년 전에 영화 '300'으로 제작됐던 내용이다.
이때 아하수에로가 투항을 권유하면서 그리스 전체를 지배할 권리를 주겠다고 했지만
레오니다스는 "살아서 그리스를 다스리는 것보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죽겠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그들은 몰살당했고 훗날 그곳에 '이국인들이여,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전하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우리는 모두 이 땅에 잠들었노라고…'라는 내용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그냥 몰살당한 것이 아니다. 그 전투에서 바사군 2만 여 명이 죽었다.
전운이 더 깊어져 갔다. 그리스 국토의 3분의 2가 유린당했다. 아테네의 데미스토클레스는 평원에서 싸우면 승산이 없다는 판단으로 성을 비워둔 채 살라미스섬으로 피신했다.
텅 빈 성에 입성한 바사군은 사방에 불을 질렀다.
아테네 시민들은 자기들이 살던 성이 불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이제 살라미스 해전이 일어날 차례다.
그런데 주전 483년, 아테네의 라우레이온에서 어마어마한 은광이 발굴됐다. 아테네 시민 한 사람당 10드라크마씩 분배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데미스토클레스는 전쟁을 대비해서 해군력을 증진하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갤리선이라고 불리는 3단 노선 200여 척을 건조했고, 아테네는 해상 강국이 됐다.
이때 아하수에로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 옥좌를 놓고 앉아서 해전을 구경했다. 완승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바사는 큰 배가 1000척인데 비해 아테네는 작은 배가 370척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데미스토클레스가 바사 해군을 좁은 해협으로 유인한 다음 충돌 전법으로 맞서서 11시간 만에 승리를 거뒀다.
아하수에로는 200여 척의 전함이 격침당하고 200여 척의 전함이 포획당하는 것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아테네의 피해는 40척에 불과했다. 살라미스 해전은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해전이다.
마라톤 전쟁이든 살라미스 해전이든 아테네 입장에서는 국운을 건 싸움에서 이긴 것이었다. 하지만 바사 입장에서는 자기들의 패권을 확인하려는 전쟁에서 진 것에 불과했다.
육군이 여전히 건재했고 함선들도 남아 있었다.
아하수에로가 다시 공격을 명했다. 살라미스섬을 철저하게 짓밟을 작정으로 마르도니우스한테 그 임무를 맡겼다.
마르도니우스는 일단 아테네를 회유하기로 했다.
사절단을 보내서 아테네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고 파괴된 도시도 재건해줄 것이며 그리스 세계에서의 패권도 계속 인정해주겠다고 했다.
상당히 달콤한 제안이다. 리키다스라는 명문 귀족이 그 제안을 민회에 회부해서 논의해보자고 했다.
그랬다가 그 가족까지 전부 돌에 맞아 죽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그런 제안을 듣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플라타이아 전투가 벌어진다. 마르도니우스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아테네 시민은 다시 살라미스섬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재건한 아테네가 다시 불타게 됐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런 그들이 항복 논의를 거절했으니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 뇌리에 항복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지구전에는 살라미스가 유리하다. 하지만 바사를 몰아내려면 살라미스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육지에서 이겨야 한다. 마침 스파르타가 동맹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아테네도 8000명의 중무장 보병이 있었다.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 바다에서 다시 뭍으로 올라온 것이다. 고향을 잃고 난민으로 떠돌던 플라타이아의 중무장 보병 600명도 참전했다.
두 군대가 테베 인근 플라타이아 평원에서 대치했다. 불에 탄 플라타이아가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이때 그리스 연합군은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한밤을 이용해 플라타이아 쪽으로 후퇴하는데 어둠과 낯선 지형 때문에 대오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마르도니우스가 기회가 놓치지 않고 총공격을 명했다. 바사군은 스파르타군과, 테베군은 아테네군과 맞붙었다.
테베는 동족인 그리스를 버리고 바사 편에 붙었다. 스파르타는 최악의 상황에서 전투를 시작했지만 끝끝내 판세를 뒤집어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전사들로 구성된 스파르타의 방진은 천하무적이었다.
난전 중에 마르도니우스가 죽었고, 그것으로 바사가 무너졌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에 바사군이 거의 전멸했다.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 이어서 다시 그리스 연합군이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었다.
패권주의를 표방한 바사의 코만 납작해졌다.
우리는 복음을 종교 용어로 알고 있지만 헬라 시대에는 전쟁 용어였다. 승전보를 복음이라고 했다.
강학종 목사 / 하늘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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